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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규영 , 안 들어가고 뭐해? 나 기다렸냐?”
“ 어? 어... 너 오디션인가는 잘 봤냐?”
“ 막 떨어서 오줌 싸는 줄 알았다.”
“ 편하게 하지 뭘 떨어?”초인종을 누르니 소연이 목소리가 들린다.
“ 오빠들 같이 오네? 들어와요. ”
“ 어서들 오게. 자네들 오니 내가 부자가 된 것 같아 참 좋아.”
“ 뭘 이렇게 많이 차리셨어요?”
“ 소연이 네가 다 한건 아닐 테고 이모부님 요리 잘 하시나 봐요?”
“ 울 아빠 애인이 요리솜씨가 좋으시지.”
“ 너 이 녀석, 애비를 놀려라.”
“ 놀리긴요. 제가 왜 아빠를 놀려요? 오빠들한테 자랑 한 거예요.”
“ 시장하겠다. 입에 맞을지 모르나 만든 사람 성의를 봐서 천천히 많이 먹게나.”
“ 그런데 이 많은 걸 만드시느라 애쓰신 분은 어디계신가요? ”
“ 일이 있으시다고 가셨어요. ”
“ 제가 막걸리 사왔습니다. 한잔 받으시죠. 이모부님.”
“ 막걸리, 좋지? 내가 오늘 아들을 셋이나 얻었군. 같이 막걸리 잔을 부딪칠 수 있으니 난 소원 풀었네.”
“ 아빠는 왜 자꾸 아들 타령이예요? 엄마 계실 때는 안 그러시더니.......자꾸 그러면 나 확 비뚤어질텐데.......”
“ 우리 딸이 그럴 리가 있나......”
“ 그럴 리가 있죠. 저 밖에 없다 하신 건 잊으셨어요?”
“ 당연히 내 딸이 최고지. 내가 옛날 얘기 하나 할까?”
“ 오늘만, 딱 오늘만 봐드려요.”
“ 이모부, 소연이가 벌써부터 우리를 질투하네요.”
“ 심술이 대단할 텐데.......”
“ 견뎌낼 수 있을지......”
소연이가 기철이를 향해 눈을 흘기며 각오하라는 듯 묘한 웃음을 보인다. 그 귀여운 모습에 눈을 못 떼던 지훈이, 저 자식이 선뜻 이곳으로 들어온 이유가 보인다.
“ 소연아, 너 태어나기 전에 네 오빠가 있었단다. 기철이 보다 한살 위였지.”
“ 아빠, 여태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어요.”
“ 소연이 네 나이가 스물여섯이니...26년 만에 꺼내는 얘기라면 믿겠니?”
“ 이모부, 그럼 그 동안 비밀이었던 거예요?”
“ 비밀이라기보다 ‘금기’라고 봐야지. 약속한 것은 아니지만 네 엄마와 난 재민이 얘기를 한 번도 꺼내지 않았다. 소연이 너 아니었으면 네 엄마는 이미 죽은 사람이었어. 나도 그랬겠지. 한참 이쁜 짓 시작한 어린 것이 몹쓸 병에 걸려 우리 곁을 떠나는 날, 그 녀석 오래 지켜주지 못하고 같이 해보지 못한 것들이 목구멍에 걸려서 목 놓아 울어지지도 않더라. ”
“ 이름이 뭐라구요?”
“ 재민이, 전 재민. 재민이 보내고 한동안 네 엄마는 물 한 모금 못 넘기고 거의 산송장처럼 지냈어. 배속에 소연이 너 생긴 거 알고서야 먹기 시작하더구나. 네 엄마 까지 잃는 줄 알았는데 희망이 생긴 거지.”
“ 한잔 더 받으세요. ”
“ 재민이가 살아있었으면 네 엄마가 그리 빨리 가지 않았을 지도 몰라. 네 엄마가 떠나는 날 그러더라. 먼저 가서 재민이 만나고 있을 테니 소연이 너 잘 부탁한다고”
“ 아빠, 그만 하세요. 그러다 취하세요.”
“ 취하라고 마시는 건데 취하면 어때? 아버님 한잔 더 받으세요?”
“ 아버님? 허, 듣기 좋네. 자 따라보게. 아들이 주는 한잔 술은 술술 넘어가겠지.”
소연이의 눈가도 아버님의 눈가에도 쓸쓸함이 젖어나고 모두들 술에 젖어들었다. 술자리가 길어지고 비어가는 술병이 늘어갔지만 나는 취할 수 없었다. 이모부님의 옛이야기에 놀라기도 했지만 술잔에 떠 있는 연주 얼굴이 자꾸 흔들려서 붙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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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이 지났다. 여전히 눈을 뜨면 그의 얼굴이 떠오르고 아침인 것을 확인한다. 그를 전혀 지우지 못했다. 그사이 아르바이트 자리를 하나 구했고 엄마와 소연에게 쓴 편지를 부쳤다. 꼭 손 편지를 써 보내달라는 소연이의 부탁도 있었지만 우체국을 찾아가 그리운 사람에게 편지를 부치는 것을 해보고도 싶었다. 우표를 사고 우체국 풍경도 둘러보았다. 그리움을 담은 얼굴로 왔다가 가는 사람들이 참 많다.
알바를 구할 수 있었던 것은 참 다행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를 다니며 결혼 자금으로 모은 돈을 털어 이곳에 왔다. 유학생에게 일자리를 허용하지 않는 것이 법이지만 마냥 갖고 있는 돈을 쓰기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일자리를 구해야 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차에 운이 좋았다. 한국어를 배우고 싶어 하는 어린아이 둘을 가르칠 수 있게 된 것이다.
중학교 2학년 때 온 가족이 이민을 가게 되어 헤어진 친구 유진이와 연락이 닿아 소개를 받은 것이다. 학교 다닐 때 별로 친해질 시간도 없이 헤어지게 된 친구였는데 고맙게도 나를 기억해 주고 찾아 주었다. 한국에 갈 때마다 또는 기회가 닿을 때마다 혹시나 하고 내 소식을 물었다고 했다. 내 메일주소로 안부를 물어왔고 내가 미국에 온 것을 알게 된 후 또 이렇게 불쑥 도움을 주었다. 유진이가 살고 있다는 시애틀은 너무 멀다. 그래도 만날 기회가 있겠지...
내가 가르쳐야 할 아이들은 삼남매인데 부모님이 샌프란시스코 시내에서 꽤 큰 레스토랑을 운영하신다고 들었고 일주일에 두 번, 한 시간 반씩 한국어 수업을 하기로 했다. 자택은 외곽의 조금 떨어진 곳에 있어 차로 나를 데리러 와 준다니 감사한 일이다. 수업은 2주 후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9월 신학기가 시작인지라 나도 준비할 것이 많은 것을 알고 적응할 시간을 배려해 결정한 것이다.
나는 아카데미미술대학에 등록하여 실용미술을 공부하기로 했고, 이젠 정말 머릿속을 새로운 계획들로 가득가득 채워가는 중이다. 그래서 점차 그의 얼굴을 조금씩 지워가기를 바랬다.
잠시 후 나의 방에 손님이 오기로 했다. 옆방에 함께 사는 셀린과 에밀리가 함께 와 커피를 마시기로 했다. 그 둘은 사촌간이라는데 이제 스물하나, 스물셋으로 나보다 한참이나 어렸지만 친구가 될 수 있었다. 고향은 애틀랜타이며 가족이 많은데 스무 살이 넘은 후 대부분 각지로 흩어져 직장을 갖거나 공부를 한다고 했다.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셀린의 목소리가 들렸다.
“ Hi, Julia. May I come in? ”
“ Sure, welcome. Do you wanna coffee?”
“ Yes, please. ”
나의 영어 이름이 ‘줄리아’ 낯설다. 연주라는 이름 외에 또 하나의 이름을 정했다. 내 이름조차 지우고 싶은 것은 아니지만 연주라는 이름을 어려워하는 친구들을 위한다는 핑계를 삼아 더 달라지고 싶은 욕심까지 담아서 찾은 이름이 ‘줄리아’이다.
나는 커피와 토스트를 대접했고 셀린과 에밀리는 과일을 가져와서 함께 먹었다. 동양인 친구를 갖게 되어 기쁘다는 그녀들처럼 나도 친절하고 귀여운 친구가 생겨서 든든했다. 셀린은 의상디자인을 공부하고 에밀리는 보석디자인을 공부한다. 다들 같은 디자인계통이라 서로 도우면서 열심히 경쟁해보자고 마음을 다져본다. 나의 나라를 궁금해 했고 꿈이 자라고 있어서 행복한 친구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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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이 지났다. 연주 어머님께 내 연락처가 전달되지 않은 걸까? 답답한 마음을 누를 수가 없어 퇴근 후 한없이 눌린 내 마음은 연주의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도로에서 올려다 본 연주네 집은 어두웠다. 집에 아무도 없는 듯하다. 하필 먼저 만났던 경비 아저씨는 보이지 않고 다른 분이다. 일단 누군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무작정 집 창에 불이 켜지기 까지 기다려 보기로 했다. 달리 떠오르는 방법도 없었고 그냥 돌아갈 수도 없다. 차 안에 앉아 기다리기가 여간 곤혹스러운 것이 아니다. 기다리다보니 시간은 더욱 더디 간다. 몇 시간이 넘도록 카페에서 날 기다려주던 연주의 모습이 떠올랐다. 일부러 늦은 것이 아니고 회사에서 일이 늦어진 것 이라는 핑계로 잘못 한 것이 없는 늘 나는 당당했고 그걸 또 아무렇지도 않게 읽던 책을 덮으며 웃음으로 반겨준 연주... 그녀의 웃던 모습이 서늘하게 보인다. 서늘함에 놀라 깼다. 잠깐 졸았나보다. 그사이 연주네 집 창이 환해진 것을 확인했다. 연주의 집 초인종에 손을 올리자 가슴이 쿵 쿵 두근거린다. 연주가 나오면 뭐라고 말을 하지?’날 보면 놀랄 텐데.......
“누구세요?” 연주가 아니다.
“네, 실례합니다. 이연주 씨 집인가요?”문이 열렸다.
“ 안녕하세요? 하규영 이라고 합니다.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와 죄송합니다. 연주와 연락이 되질 않아서요. 혹시 집에 있나요?”
“아니요, 집에 없어요. 무슨 일로 찾으세요?”
“꼭 만나서 전해야 할 말이 있어서요.”
“당분간 만날 수 없을 거예요. 어디 좀 갔어요. 연락 오면 전해 줄 테니 얘기 하세요 ”
“ 언제 오나요? ”
“ 모르겠어요. 오래 걸릴 거예요. 언제가 될지 기약 없이 갔어요.”
“ 어디로 갔는지 알려주시면 제가 찾아가서 만나겠습니다.”
“ 한국이 아니에요. 그리고 그건 말씀해 드릴 수 없네요. 연주가 당부 했거든요.”
“ 저 꼭 만나서...”
“ 아무에게도 알려주지 말라고 했어요. 필요하면 제 스스로 알아서 연락을 할 거니까”
“ 부탁드립니다. 해가 되게 하지 않을 테니 연락처를 좀 알려 주세요”
“ 미안해요. 힘들게 떠난 애 신경 쓰이게 하고 싶지 않아요. 그만 돌아가요”
“..........”
도대체 왜? 연주야 무슨 일 인거야? 왜 한마디 말도 없이? 그 때 내가 바빠서 나중에 통화하자했던 그 전화가 연주가 하려했던 인사였을까? 닫쳐진 연주의 집 문 앞에서 한참을 멍하니 서있었다. 되돌아 나오는 무거운 발걸음을 겨우 집으로 옮겨와서는 불도 켜지 않은 채 주저앉아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는 황망함을 감당해 내고 있는 나 스스로가 낯설게 느껴졌다. 연락을 하겠지....... 말없이 떠난 이유와 그 동안의 사연을 줄줄이 적어 편지라도 하겠지....... 기대감이 생겨나면서 갑자기 연주가 보낸 택배를 확인하지 않고 방치해 둔 것이 생각나 얼른 불을 켰다.
[보낸 사람 이연주...]
상자를 뜯어 열어보았다. 연주가 갖고 있던 내 사진과 내가 사준 몇 안 되는 선물들이 얌전히 들어있었다. 상자 어느 구석에도 내게 남기는 편지나 연락할 곳이 적힌 메모는 없었다. 머릿속이 하얘지는 것 같더니 갑자기 현기증이 일었다. 연주는 유학을 핑계로 숨어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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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소연에게 답장이 왔다. 엄마는 여전히 딸 걱정에 잔소리를 한가득 편지에 쏟아 놓으셨고, 소연은 함께 살게 된 오빠들 이야기와 뒤 늦게 알게 된 친오빠에 관한 이야기를 쏟아 놓았다. 가슴 아팠을 부모님의 마음이 안타까워 속상했고 돌아가신 엄마가 너무 보고 싶은 마음을 나에게만 털어 놓는다고 고백했다.
아저씨의 마음속은....... 먼저 보내야 했던 사랑하는 이들에게 내어줄 자리를 마련하느라 비워내기를 얼마나 많이 하셔야 했을까? 이제 그 외로움을 엄마가 채워 드리도록 내가 비켜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마음 같지 않게 아저씨에게 살갑게 굴지를 못했다. 아빠의 빈자리를 채워주려는 아저씨 때문에 더 아빠가 그리웠던 것을....... 아빠에게 부려야 할 심술을 아저씨에게 드러냈고 또 그것을 고스란히 받아준 고마운 분....... 마음이 아파온다. 속수무책으로 사랑하는 이를 차례로 떠나보내야 했던 고통의 시간이 나에게 고스란히 전해온다.
‘아빠, 엄마 꿈에 나타나서 엄마를 제대로 보내줘요.’
너무나 보고 싶은데 한번을 나타나지 않아 원망스럽다는 엄마 말이 떠올랐다. 꿈에서 라도 만나서 그 원망을 풀면 엄마도 아저씨에게 갈 수 있지 않을까? 아저씨도 엄마도 아빠를 잊을 수 없겠지.......
겁이 난다.
눈을 떠도 눈을 감아도 보이는 그의 얼굴을 난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늘 먹먹한 그리움 한 움큼을 흩어버리지 못한 채 살아가게 되는 걸까?
그를 떠난 이유는 나 때문이다. 온전히 나를 바라봐 주기를 욕심냈고 내 아픔을 알아달라고 투정부려도 듣지 않는 그에게 실망하고 또 기대하고 ....... 그를 기다리면서 행복해하다가 만나면 더욱 그리워 목말라했다. 나를 배려하지 않는 그를 원망하는 내 욕심이 항상 나를 괴롭게 했다.
내가 떠난 것을 그는 어떻게 받아들일까? 정말 모르겠다. 그에게 나의 존재감이 어느 정도 일지 가늠할 수도 없고 또 생각하다보면 쓸쓸해져 서글펐다.
새로운 사랑을 만나서 그 사랑으로 잊으라던 이들은 정말 그렇게 나름의 아픈 사랑을 치유했을까? 그도 누군가를 만나서 다시 사랑을 하게 되면 그에게서 나도 잊혀 지겠지....... 나도 그를 지울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