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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에 가서 찢어져 꿰맨 손을 소독하면서 상처가 아물어도 흉터는 남겠다 싶은 생각이 들면서 생각의 꼬리는 연주에게로 이어졌다. 연주를 다시 만나면 나로 인해 생긴 상처가 얼마나 아팠는지 얼마나 큰 흉터로 남았는지 확인하고 싶어졌다. 흉터를 지워줄 수 만 있다면 다시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지울 수 없다 해도 어루만지며 더 이상 아프지 않게 보듬어 주고 싶다. 찾아야 한다. 연주가 왜 떠났는지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알게 되었고, 더 이상은 돌아오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닿으면서 찾아 나서지 않으면 영영 내 앞에 나타나지 않을 것 같은 불안함이 커져갔다.
너무 늦지 않게...... 나를 잊기 전에.......
“ 어머님, 연주연락처를 좀 주세요. 부탁드려요. 꼭 만나야 해요, ”
“ 하규영이라고 했지요? 잊으려고 떠난 애예요, 그렇게 떠나보내기 싫어서 사정도 해보고 화도 내보고 말릴 만큼 말려도 봤어요. 결정이 쉬웠겠어요? 힘들게 떠난 애에요. 흔들지 말아줘요. ”
“ 그런 거 아닙니다. 절대로 힘들게 하지 않을게요.”
“ 내가 부탁할게요. 찾지 말아줘요. 우리 연주 그냥 내버려 둬요. ”
“ 제가 잘 못한 것을 이제야 깨닫습니다. 어머님 기회를 주세요. 용서를 바라는 게 아닙니다. 연주가 더 이상 아프지 않게 하겠습니다. ”
“ 미안하지만 알려줄 수 없어요. 난 연주의 선택을 믿고 따를 거예요. 돌아가요 ”
닫쳐진 현관 앞에서 그리움이 사무치게 무너져 내렸다. 어머님이 원망스러워서가 아니다. 딸의 선택을 믿는다는 말씀에 더 이상 떼를 쓸 여력이 나에게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한걸음도 떼어지지 않아 한참을 그대로 굳어 버린 두발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엘리베이터가 열렸고 누군가가 내려서 앞집으로 들어갔다. 그제서야 돌아서 엘리베이터를 탔다. 1층에 도착했을 때 우편함이 눈에 들어왔다. 혹시나 해서 우편물을 뒤져보니 아무것도 없었다. 허망함만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연주의 메일 주소가 있을 것 같아서 노트북을 열고 메일함을 열어 확인 못한 연주의 메일이 있는지 꼼꼼히 확인해 보았으나 연주가 남긴 메일은 찾을 수 없었다. 다만 주소록에 남겨진 연주의 메일 주소만 찾을 수 있었다.
연주에게....
어디 있는 거니?
잘 지내고 있어? 난 잘 지낼 수가 없어. 너에게 해 줄 말이 많은데 ......
보고 싶다. 연주야.
나에게 너와 함께 찍은 사진이 한 장도 없다는 것을 알았어. 우린 함께 사진도 남기지 않고 무얼 한 걸까? 무심한 내 탓이겠지....미안하다.
날 떠나려 준비하던 너도 지금의 나처럼 많이 쓸쓸했었던 거야?
나 오늘은 술 안 마셨어. 이따가 또 미친 듯이 마시게 되겠지만 .......
네 연락처를 알려 달라고 어머님을 만나서 떼를 쓰며 사정을 했는데 소용이 없었어. 어머님께서도 내가 달갑지 않으시겠지....... 알아.... 그렇지만 ......
또 찾아 뵐거야.
나 없는 곳에서 넌 견딜 수 있니? 몰랐었어. 네가 사라진 이 세상이 나에게 얼마나 낯선 곳인지...... 정말 몰랐어. 그래서 너무 놀랐고 지금은 겁이 난다.
설마 내가 널 찾지 못하지는 않겠지?
네가 어디서든 이 글을 읽고 답장을 보내온다면 좋겠다. 그래주면 좋겠어.
연주야, 우리가 함께했던 시간이 다 어디로 갔을까?
두서없이 생각나는 대로 쏟아내며 연주가 어디선가 열어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e메일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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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주말 아침, 며칠 앓고 나니 미뤄두었던 일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디자인 수업 중에 구두를 디자인해서 제출해야하는 것이 있었고, 지난주에 못한 한국어 수업을 오늘 오후에는 다녀와야 한다. 아침 일찍 일어나 책상에 앉아 토스트 한 조각을 베어 물며 색연필을 움켜쥐고 끄적끄적 스케치를 하는데 맘대로 잘 되질 않는다. 하이힐, 플랫슈즈, 웨지힐, 스니커즈스타일도 여러 가지를 그려보았지만 아직 어떤 용도의 구두를 디자인할지 방향도 잡지 못하고 있다. 한국적인 문양을 응용해 볼까 고심하다가 창호지문의 격자무늬를 세련되게 표현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고 나 자신이 좋아하는 하이힐을 디자인해 보기로 결심을 굳히고 다시 스케치를 시작했다. 구두를 그리면서 서울의 인사동을 떠올렸고 경인미술관 뜰을 떠 올렸다. 야외 카페테이블에 앉아 이야기 나누는 연인이 있다. 정말 그들이 연인이었을까?
“ 나 규영씨랑 여기 와보고 싶었어요.”
“ 왜? 별거 없구만. 누구랑 왔었는데?”
“ 친구랑... 난 이런 분위기 참 좋은데 별로예요?”
“ 난 이런 거 뭐 그냥 그래... 여기 오래 있을 거야? 그만 가자!”
“ 벌써? 나 아직 다 안마셨는데....”
“ 약속 있어. 친구들이랑 저녁 먹을 거야.”
“ 그런 말 없었잖아요. 난 이 근처에서 저녁 먹을까 했는데........”
“ 가자! 일어나 ”
“ 그럼.........먼저가요. 난 더 있다 갈래요.”
“ 혼자? 여기서? 왜?”
“ 약속 있다면서요........ 그러니 먼저 가라구요.”
“ 같이가~! 여기 혼자 왜 있냐? 청승맞게...”
“ .........”
“ 같이 저녁 먹을까?”
“ 정말? 그럼 약속은? 안 가 봐도 돼요? ”
“ 내 친구들 너두 알잖아, 같이 저녁 먹으면 되지. ”
“........ 싫어요........ 불편해서........”
“ 왜? 뭐가? ”
“ 규영씨 친구들 만나는데 내가 끼면 좀 그렇지 그렇잖아요? ”
“ 괜찮아.”
“ 나 데려간다고 한 거예요?”
“ 아니, 그냥 가면 되지 뭘...”
“ 그럼 안 갈래요.......”
“ 그래?, 그럼 관둬. 난 간다. 진짜 더 있을 거야? ”
“......... 그래요........ 가요........”
기분이 상했다. 그렇게 가는 그가 야속하고 화도 났다. 늘 내 기분은 아랑곳 하지 않았다. 자기 맘대로 하고 싶은 것은 해 버렸다. 내가 섭섭하거나 화가 난 것을 알면서도 무시하는 건지, 정말 모르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어릴 땐 ‘오빠’라 불렀지만 좀 나이가 들어서는 ‘규영씨’라고 부르며 존대를 했다. 그렇게 자신을 부르는 호칭이 달라진 것 까지도 그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섭섭한 마음의 끝자락은 항상 꼬여버렸다. 이 사람에게 나의 존재감은 어느 정도인지 혼자서 저울질 하며 깃털처럼 가벼움을 가늠하게 되고, 점점 더 미끄러져 내려가는 나의 무거운 기분은 바닥의 깊이를 찾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옛날 영화를 본 것 같은 아득함이 그대로 스케치북에 옮겨진 듯 그려낸 구두의 디자인에서 진한 그리움이 묻어난다......
구두의 색을 결정했다. 흑백영화의 느낌이 나는 그레이톤....... 그리움도 서운함도 묻어나는 느낌이다.
조금만 수정하고 보완하면 과제로 제출해도 좋을 만큼 만족스런 디자인이 나온 것 같다. 나 혼자의 평이지만....
허기가 밀려온다. 냉장고에 남은 과일과 비스킷 몇 조각으로 점심을 때우고 세탁물을 챙겨 지하 1층의 세탁실로 내려갔다. 마침 셀린이 세탁을 하고 건조되기를 기다리는 동안 책을 읽고 있었다. 내가 다가가 인사를 하자 반갑게 인사를 한다. 한동안 아팠던 것을 알고 이젠 괜찮은지 묻고 건강 챙기라며 엄마처럼 잔소리를 섞는다. 나보다 나이는 어려도 어른스럽다. 동양인들이 훨씬 어려 보인다더니 여기서는 내 나이를 말하면 다들 놀랜다. 셀린이 먼저 돌아간 후 나는 빙글빙글 돌아가는 세탁기 속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다가 어지러움을 느꼈다. 내 머릿속도 다 흔들어 털어버리고 세탁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무시로 나타나는 그의 기억은 얼마나 더 버텨야 털어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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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에게
꼭 눈이 올 것 같은 하늘이다.
초겨울날씨를 아직 ‘늦가을’이라며 가을을 붙들고 싶어 하던
너의 목소리가 다시 들릴 것만 같아.
이대로 가을이 다 지나버리게 두는 거니?
거리에서 널 닮은 모습을 하고 지나는 여자를 보면
꼭 네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고
그때마다 멈춰선 두발은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을 못 찾고 서성인다.
어떻게 할까?
나 아침에 눈뜨면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내야 할지 네게 묻는다.
묻고 또 묻는데 .....
보고 싶어. 어디 있는 거니?
안단티노에 자주 간다.
우리가 앉았던 그 자리에 앉아서
날 기다리고 있던 널 바라보다가 오는 거지 ...
말없이 고개 숙이고 책을 보다가 가끔 창밖을 둘러보던 네 모습만 보이더라.
네가 좋아하던 곡이 흘러나올 때는 곡 제목이 궁금해진다.
네가 전에 알려 줬던 것 같은데 기억나지 않더라구.
그래서 미안해.
하루하루 지날수록 점점 두려워진다.
네가 정말 나를 다 지워버리면 어쩌지?
차라리 다 지워버리면 다시 시작하기 쉬울까?
내가 모른 척 했던... 그래서 가슴저려했던 네 아픔이
다 지워져 버리면 밝은 네 웃음을 찾아 줄 수 있을 것도 같아.
어디 있든 더 이상 아프지 않길 바래.
네가 어디 있든 널 찾아야 겠어. 그래도 될까?
수신확인을 체크해 보면 아직도 연주는 나의 메일을 확인하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일기를 쓰듯 메일을 보낸다.
혹시나 답장이 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포기할 수 없고 지금의 내 마음이 연주에게 닿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아직 손이 다 아물지 않았다. 계속 마셔대는 술 때문에 덧나기도 했고 상처가 꽤 심했던 탓도 있다. 술에 취해 현실을 잊고 싶었지만 취할수록 더욱 진해지는 그리움에 괴로웠다. 이제는 술을 끊어야겠다. 술을 마시면 연주의 쓸쓸한 얼굴이 나타나 더 괴롭다. 방법을 찾아야 한다. 어떻게든 연주를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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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애틀에 사는 유진에게 연락이 왔다. 남편 회사에 일자리가 있는데 공부하면서 할 수 있는 일인 것 같아서 추천했다고 자기소개서를 보내보라는 것이다. 이렇게 신경 써서 챙겨주는 친구가 너무 고맙고 감사했다. 자기소개서를 작성해서 친구가 알려준 메일 주소로 보냈다. 한국의 패션회사와 제휴하고 있는 회사라 내가 도움이 될 것이라고 격려해주는 유진에게 내가 어떤 믿음을 준 것인지 도무지 모르겠다. 한동안 쓰지 않던 메일함을 열어 보니 광고메일과 알림 메일들이 마구 섞여 있었다. 대충 삭제할 것들을 골라 지워가며 정리가 하던 중.......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손가락이 굳어버려 움직여지지 않았다. 하규영의 아이디 ‘푸른 돌고래’가 꽤 많이 나타나 그 푸른색을 물들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분명히 그 사람이 보낸 것이 맞을 터였다. 어떻게 메일을 보낼 생각을 했을까? 그동안 잘 지냈을까? 날 찾았을까? 뭐라고 보낸 걸까?
머릿속이 웽웽 도는 것 같은 어지러움이 일었다. 떨리고 두려웠다. 얼굴엔 벌써부터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참아왔던 그리움이 끊임없이 밀려와 심장을 짓누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한참을 멈춰서 그의 이름에 붙들려 있었지만 도저히 메일을 열어 볼 수가 없다. 열어보지도 않은 채 떨리는 손으로 메일을 삭제해 버렸다. 스팸메일로 등록해 두면서 까지 스스로에게 잔인하게 굴었다. 그렇게라도 해야만 마음을 다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이미 무너져 내린 마음을 추스를 수가 없고, 떠나온 지 몇 달이 지난 지금 조금도 지우지 못한 그의 이름이 원망스러울 정도이다.
많이 바빴고 어떤 날은 정말 그의 생각을 몇 번 떠올리지 않을 만큼 이 곳 생활에 적응하며 열심히 보냈다. 문득 문득 그를 떠올리는 시간이 많이 줄었다고 느껴질 때 약간의 서글픔이 묻어나기도 했다.
그런데 고작 메일함에 나타난 그의 아이디만으로 모든 게 무너져 버린 것이다. 여태 죽을 만큼 애쓴 보람이 없다. 어찌해야하나.....
삭제해 버린 메일의 내용이 궁금해지면서 내 맘속은 지옥으로 변했다.
날 그리워하는 걸까? 화가 났을까? 내 마음을 알까? 어쩌면 난 이제 혹시 다시 오게 될지 모른다는 기대로 그의 메일을 기다릴 지도 모르겠다. 기다림은 나를 외롭게 하고 또 아프게 할 것이다.
그를 떠나와 홀로 맞이한 가을에 ... 한겨울보다 더한 한기를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