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빠들... 내려와 식사해요.”
아래층에서 저녁 먹으라고 알리는 씩씩한 소연의 목소리다.
오피스텔을 정리하고 나도 이집으로 들어오기 까지 많은 일이 있었다.
아버지께서 갑자기 쓰러지시는 바람에 수술비가 필요했고 나에게는 오피스텔의 전세금이 있었다. 이모부님의 권유를 감사히 받아들였고 덕분에 아버지께서도 수술을 무사히 마치고 회복 중에 계신다.
이집에 소연을 제외하고 남자만 넷.
규칙이 생겨났다.
1. 아침은 꼭 먹기, 주말에 한 끼는 온 식구가 같이 준비해서 같이 먹는다.
2. 청소는 구역을 정해서 나눠하고 빨래는 각자 알아서 하기
3. 귀가시간은 미리 알려서 걱정하게 하지 않기
4. 생활비는 매달 정한 날짜에 입금하기
5. 한 가족처럼 편안히 지내기.
오늘은 일요일 저녁, 온 식구가 같이 준비해 같이 먹는 날이지만 특별히 소연이가 솜씨를 발휘해 본다고 다들 올라가 있으라 명령했기에 게으름을 피우는 중이었다. 이모부님을 닮아 소연이도 마음 넉넉한 아가씨다. 지훈의 애정 어린 시선을 눈치 채지 못할 만큼 무딘 아가씨이기도 하다. 지훈이는 인턴생활을 잘 마치고 홍보부에 배치되어 잘 다니고 있다. 기철이는 오디션에서 계속 떨어지기를 밥 먹듯 하고 있다. 그래도 대학로에서 작은 역할이지만 코믹연기를 하며 자신의 꿈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소연은 시립도서관에서 독서 지원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담당하는 일을 열심히 하고 있다. 친구 동생이라 그런지 어리고 여린 애로만 생각되지만 맡은 분야에선 실력자인데 몰라봐 준다고 큰소리친다.
다들 그렇게 별일 없이 산다. 적어도 내 눈엔 그렇게 보인다. 오롯이 나만 숨쉬기 버거운 듯 느낀다. 내가 바라보는 곳엔 늘 연주의 얼굴이 오버랩 되어 후회로..... 현실이 아님을 자각하고 실망하며....
어쩌면 난 두 세상을 사는 것 같다.
연주와 함께 했던 시간을 다시 되돌리며 사는 것 같은 그런 나날들이 계속된다. 두 서너 개의 프로그램을 동시에 틀어 놓고 보는 것 같은.... 다시 만나면 보여줄 나의 마음을 연습하듯 또 하나의 세상을 덧 입혀 하고 싶은 말들을 차곡차곡 쌓으며 오늘 하루도 그렇게 보내고 저녁을 맞는 것이다.
오늘 점심엔 연주 어머님을 다시 찾아뵈었으나 만나 뵐 수 없었다. 연주의 소식이 궁금했고 아무말씀도 해 주지 않으실 것을 알지만 혼자 계시는 것이 또 신경 쓰이기도 했다. 내가 연주를 저리 지독하게 밀어낸 걸까? 엄마를 홀로 남겨두고 떠날 만큼? 곧 돌아오겠지... 설마... 가슴에 돌 하나를 더 얹은 것 같다.
내가 뭘? 어떻게 했다고? 잊어버리자 마음먹을 때도 있다. 까짓 뭐, 여자가 너 뿐이냐? 그러나, 답답하다.
“ 우와~, 설마 이 많은 음식을 너 혼자 다 한 거라고?”
“ 규영아, 얼른 와봐라. 이게 넌 믿기냐?”
“ 기철 오빠 언제 왔어? 아직 안 온줄 알았는데... 잘 하고 왔어?
얼른 손부터 씻고 와. 으그, 그 손으로 음식을 집어먹으면 어째? ”
“ 이런 또 늙은 누나의 잔소리... 오빠라고 하질 말든가. ”
“ 정말 뭐가 이리 많아? 오늘 무슨 날이야? ”
지훈이가 자리에 않으며 달력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 어? 규영아. 거기 뭐라 적힌 거야? 오늘 날짜 밑에 뭐라 적혀 있는데...?”
“ 내 생일? 소연이 글씨인가? 어? 오늘이 소연 생일이야? ”
어쩌나, 얹혀사는 놈들이 주인댁 따님 생일을 아무도 몰랐다. 그렇다고 제 생일 상을 스스로 차려서 대접하니 더 미안해진다.
“어서 앉아라.”
이모부님이 케이크에 불을 밝혀 들어오신다.
“ 생일 축하 합니다.~ 사랑하는 우리 딸 ~ 생일 축하 합니다.”
“ 축하한다. 소연.”
“ 맨 입 안 되는 거 알죠? 다들 몰랐으니 선물 준비된 것은 없을 테고... 나중에....
<내 부탁 하나씩 무조건 들어주기> 잊지 마셔요.“
“ 헉, 그런 두려운 선물이 있었군.”
“ 시집온다고 하면 안 돼~~ 그러는 거 아냐~”
“ 으그, 꿈 깨요.~”
소연이가 장난스레 눈을 흘긴다.
“ 다들 앉아라, 어서 먹자. 음식들이 많이 식었구나.“
“ 죄송합니다. 눈치 없는 저희들을 용서하세요.”
“ 소연아 잘 먹을게~”
“ 내가 준비한 음식 아니고 엄마나 다름없는 분이 낮에 준비해 주신 거예요.”
“ 엄마나 다름없는 분? 이모부 재혼하세요?”
“ 쓸데없는 소리~”
“ 소연아, 설마 네가 사춘기 아이처럼 반대하는 건 아니지?”
“ 왜 아니야? 난 반대야. 멋진 울 아빠 나 혼자 독차지해야 하는걸....... 절대 반대지. ”
“ 너 치우려면 내가 재혼해야겠구나.” 소연의 장난을 이모부님이 받으셨다.
“ 어째 말 속에 뼈가 굵직굵직 들어있는 것 같습니다.”
“ 농담을 진지하게 받는 것 까지 내가 책임 질 수는 없다네.”
“ 아, 예”
“ 급격히 배가 고파지네요. 잘 먹겠습니다.”
“ 그래, 어서들 들어. ”
“ 네~, 이모부 반주 한잔 올릴까요?” 기철이가 일어나 소주를 찾는다.
“ 오빠들, 반주는 한잔씩만 하는 거죠? 내일은 월요일 이란 걸 잊지 마시길...”
“ 이모부님 제 잔 받으세요. 소연이 눈치가 보여도 잔은 넘치도록 받으세요. 건강은 괜찮으신 거죠?”
“ 검진 결과 나왔어요?”
“ 별거 없어. 나이 든 만큼 그냥 뭐 괜찮아.”
“ 규영이 자네 아버님은 이제 괜찮으신가?”
“ 네, 쉬엄쉬엄 회복중이세요.”
“ 지훈이 자네 부모님은 어떠신가? 잘 챙겨드려 자주 안부 전화 드리고...”
“ 기철오빠, 이모가 오빠 전화 잘 안한다고 섭섭해 하시는 거 모르지? 좀 자주해~ 이모가 걱정이 많으셔.”
“ 내가 안 해도 네가 미주알고주알 다 하잖아.”
“ 오빠가 안하니까~ 무슨 아들이 그래? 으그.”
“ 아들들이 다 그래~ 맘하고 다르게 표현이 서툴고 어그러지고... 재미없지 뭐~”
“ 다들 오늘 전화 한 통화 씩 꼭 드려 보거라. 부모는 자식 목소리만 들어도 마음이 녹는단다. ”
“ 예, 명심 하겠습니다. ”
“ 오빠들... 저 다음 달에 유럽출장가요.”
“ 출장? 유럽어디? 얼마나 걸리는데? ”
“ 동유럽 도서관시찰, 3주 예정인데 더 길어질 수도 있어요.”
“ 야~ 좋겠다. 유럽도 가고... 부럽네.”
“ 모르시는 말씀. 놀러 가야 좋죠. 일하러 가는 건데 뭐가 좋아요? 프로젝트 때문에 스트레스 엄청 받는다구요.”
“ 소연이 능력자인가보다? ”지훈의 말에 소연이 수줍게 웃는다.
“ 능력자는 무슨... 울 아빠, 잘 부탁드려요. ”
“ 무슨 내 부탁을 하냐, 너나 건강히 잘 다녀오면 되지.. 몸 잘 챙기거라.”
“ 나 없다고 술 너무 많이 드시게 하지 말라는 부탁인거예요. 오빠들이나 아빠나 다들 너무 술을 좋아해서 맘이 안 놓여요.”
“ 와~~ 네 잔소리 못 들어서 술맛이 나겠냐?”
기철이가 신나라하는 표정으로 놀리니 이쁘게 눈 흘기는 소연에게 눈을 떼지 못하는 지훈이가 내 눈에 또 들어왔다. 점점 커가는 마음이 속에만 담아두기 벅찬 듯 보인다. 바라보기만 하는 못난 자식, 그래도 바라볼 수 있어서 좋겠다. 저 못난 자식이 새삼 부럽다. 빈 술잔 속에 보이는 연주 얼굴을 만지작거리니 이모부님께서 잔을 채워주신다.
순간 연주의 무표정했던 얼굴이 흩어졌다가 채워진 잔 위로 떠오른다.
“ 이 잔만 하고 오늘은 그만하지 ”
“ 네, 약간 아쉬운 듯해도 그게 좋겠네요. 소연아, 덕분에 저녁 근사하게 잘 먹었다.”
“ 여행가기 전에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 생일선물로 사줄게 ”
“ 그래, 얘기해. 오빠들이 셋인데 막 불러...”
“ 어머, 내가 뭘 사달라고 할 줄 알고 맘 놓고 막 부르래? 겁이 없으시네요?”
“ 까짓, 능력 밖이면 딴 거 부르라고 하면 되지 뭐~ 아니면 못 들은 척...”
소연이가 없으면 이집이 참 썰렁하기는 하겠다. 지훈이 맘은 더 휑하겠지만...
마지막 잔을 들이켰다. 빈 잔속에 연주가 남아있다. 목구멍이 뜨거워진다. 보고 싶다.
#
유진의 남편은 어떤 사람일까? 메일로 자기소개서를 보내라더니 샌프란시스코 공항에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일종의 면접을 보는 샘인 것 같은데, 유진이가 얼마나 밀어 붙였는지 몰라도 할 일을 설명해 주겠다고 만나자는 것이다. 살짝 겁이 나기도 하고 기대에 못 미칠까봐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다. 공항지리를 잘 모르기 때문에 서둘러 약속장소로 나갔다. ‘브레이든 스미스’ 유진의 남편이름이다. 유진의 말로는 한국어를 꽤 잘 구사한다니 마음이 놓인다. 아내의 나라말이라서 그런가 했더니 ‘대한민국이 좋아서 한국인과 결혼하고 싶었다.’ 는 히스토리를 들으니 혹시 재미교포인가 싶기도 했다. 30분 먼저 약속장소에 도착했다. 제대로 찾았을까? 사야할 책이 있으니 서점에서 만나는 게 어떠냐는 물음에 나는 흔쾌히 좋다고 했다. 서점에는 여유롭게 책을 읽고 있는 손님들이 꽤 있었다.
‘어머나, 세상에....... ’ 선글라스를 머리에 위에 쓰고 바닥에 주저앉아 책에 빠져 있는 사람이 브레이든 이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선글라스에 끼워져 있는 흰 종이에 “ 제가 브레이든 스미스입니다.” 라고 한글이 적혀 있기 때문이었다. 나도 모르게 ‘푸핫’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나의 웃음소리가 작지 않았을 터인데 브레이든은 책에 빠져 고개를 들 줄 몰랐다. 나는 남은 약속시간까지 브레이든을 그대로 책에 묻어두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그가 고개만 들면 보일만한 곳에 서서 책 읽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가까이 손에 잡힐 듯 시계토끼가 눈에 들어 왔다.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 어릴 적 아빠가 사다주신 책 중에 하나였다. 저 시계토끼를 내방에 데려다 놓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빠를 떠올리게 해주어 고마운 시계토끼다. 가만히 집어 들고 브레이든을 바라다보니 때마침 고개 운동하듯 갸웃거리던 브레이든과 눈이 마주쳤다. 웃을 수밖에... 나의 웃음에 머리 위 글자를 가리키며 묻는다.
“ 이사람 알아요?”
“ 네, 저는 이연주입니다.”
“ 반가워요. 이렇게 만났네요. 언제 왔어요? ”
“ 좀 전에요, 고맙습니다. 덕분에 헤매지 않고 만날 수 있었어요.”
“ 가끔 사용하는 방법인데 누군가를 처음 만나야 할 때 딱 좋아요. 지금처럼 편히 책을 읽을 수도 있고요. 이렇게 하고 부족한 잠을 보충할 때도 있어요.”
“ 좋은 방법이네요.”
“ 엘리스? 좋아해요?”
내 손에 들려있는 책을 가리키며 묻는다.
“ 네? 아, 토끼요. 시계 토끼를 데려가 키울까 해서요.”
“ 그 토끼 말 안 들을텐데...... ”
“ 그게... 그래서 제가 키우려구요. ”
브레이든이 환하게 웃는다. 나도 함박웃음을 웃었다.
“ 식사했어요?”
“ 네, 전 괜찮은데 혹시 시장하세요?”
“ 아뇨, 전 기내식을 먹어서 ... ”
시계토끼를 데려가기 위해 책을 계산한 후 서점 옆 커피전문점으로 자리를 옮겼다.
“ 에이미가 많이 보고 싶어 해요.”
“ 저도 그래요. 유진이 여기 이름이 에이미 인거죠?”
“ 에이미 유진 스미스,”
“ 만난 지 너무 오래되었어요.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하기도 하구요. 중학생 때였으니 10년이 훨씬 넘었네요.”
브레이든이 얼른 휴대폰을 꺼내어 저장된 사진을 찾아 보여준다.
“ 자 봐요. 여기 며칠 전 찍은 사진이예요. 출장이 잦다보니 이렇게 사진을 보내줘요. 사랑스럽지 않아요?”
“ 사진을 보니 더 보고 싶어요. 아기엄마가 된다니 대단해요. 축하드려요.”
“ 고마워요. 이번 겨울에 꼭 오세요. 에이미가 정말 기뻐할 거예요.”
“ 네, 그럴 수 있으면 좋겠어요. 초대해 주시는 거죠? ”
“ 물론이죠.”
사진 속 유진은 배가 잔뜩 불러서 뚱뚱해진 임산부였다. 무거운 몸을 안락의자에 기대어 앉은 자세로 초록색과 빨간색으로 뜬 아기 모자를 배위에 나란히 얹어 두고 찍은 사진이었다. 말갛게 웃고 있는 유진의 얼굴은 내가 기억하던 소녀 적 얼굴을 간직하고 있었다. 머지않아 태어날 아기는 쌍둥이라고 했다. 유진은 아기를 위해 손수 뜨개질을 해서 모자를 완성했다고 출장 중인 아기아빠에게 보내 온 것이다. 브레이든은 딸이면 엄마를 닮아서 예쁠 것이고, 아들이라도 엄마를 닮아서 씩씩할 것이라고 했다. 자신은 행운아이며 좋은 아빠가 되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했다. 벌써 엄청난 선물을 받았다고 행복해하는 웃음이 나에게 전해져와 참 오랜만에 푸근하고 평안한 기운을 느꼈다.
브레이든이 환승할 비행기를 기다리는 사이에 만난 것이라 시간이 넉넉지 않아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누기 어려웠지만 친절한 그의 태도와 배려가 고마웠고, 든든한 친구가 있다는 안도감이 생겼다.
일단 내가 해야 할 일은 설문조사였다. 되도록 다양한 연령의 많은 사람을 만나고 그들의 직업과 선호하는 패션브랜드나 필요로 하는 스타일 등을 수집하여 보고서를 작성해 보라는 것이다. 궁금하거나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하라고 하면서‘할 수 있겠는가?’라는 질문에 열심히 해보겠노라고 대답했다. 3개월의 기한을 허락받았다. 주로 샌프란시스코 공항을 이용하기 때문에 오늘처럼 시간을 내면 만날 수도 있다한다. 필요한 자료가 더 있으면 또 주겠다고 했고 이곳에 자신의 친구들도 많으니 무슨 일이든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당부한다.
도움이 될 것이라고 참고삼아 읽어보라는 자료를 주겠다면서 기내용 수트케이스 하나를 통째로 넘겨준다. 얼결에 건네받았다. 제법 묵직한 수트케이스를 끌고 돌아오면서 생각했다.
브레이든이 행운아라더니... 내가 운이 좋은가?
처음 비행기를 탔을 때 옆 좌석의 남자에게서 담요를 양보 받는 것부터 시작으로 좋은 사람들만 만나게 되니 행운의 여신의 보호를 받는 느낌이랄까? 하늘에서 보고 계실 아빠와 품에서 떠난 자식을 위한 엄마의 기도 덕분이겠지... 그러고 보니 브레이든의 미소가 낯설지 않았던 이유를 알았다. 비행기 옆좌석의 담요주인, 그가 브레이든 이었던 것 같다. 다시 만나면 꼭 물어봐야겠다. 맞는 것 같은데......
낯선 땅에서 만나는 이들이 나에게 베풀어준 친절이 늘 고맙고 그래서 조금씩 용기가 자라나는 것 같다. 가만히 마음에 새겨본다.
주어진 이 기회를 감사히 여기고 나의 꿈을 이룰 수 있는 열쇠로 만들어야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