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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에게 가는 길이 끊어져 버렸다. 갖고 있던 주소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달리 찾을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끊어진 길 가운데 주저앉고 말았다. 그저 흘러가는 시간을 안타까워 할 뿐이었다. 연주가 머물었던 기숙사의 관리자에게 찾아가 연주를 기억하는지 물었다. ‘줄리아’수염 덥수룩한 털보아저씨가 연주의 사진을 보고 그렇게 불렀다. 이 곳을 떠나면서 혹시 우편물이 있다면 새 학기가 된 이후에 한 번 들를 테니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았다고 했다. 새 학기 시작....... 1월 중순은 되어야 하니 결국 해를 넘겨야 했다. 올 크리스마스엔 같이 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기대했었는데........
시애틀은 크리스마스 분위기로 화려하고 아름다운 야경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 속에서 가장 초라한 내가 무거운 걸음을 겨우 옮겨 숙소로 돌아와 누웠다. 몸과 마음이 지쳐서 돌아왔으니 잠이 쏟아져야 할 것인데 그렇지 않았다. 머릿속은 아직도 샌프란시스코에서 헤매고 있는 듯 했다.
줄리아.......
새 이름으로 살고 있는 그녀를 만나면 무슨 말부터 해야 할까........
그녀가 사라진 후 나는 혼란스러움을 잊으려 가슴에 폭탄을 품고 시간을 뭉개버리며 살았다. 나쁜 일은 한꺼번에 온다더니 건강하시던 아버지도 갑자기 쓰러지시고 위험한 고비를 넘기실 때 까지 불안에 떨었다. 내가 그녀에게 오기까지 보낸 시간들을 그녀는 궁금해 할까? 그동안 내가 일기를 쓰듯 보낸 메일들을 그녀는 읽지도 않았다. 어쩌면 나의 메일들이 그녀의 휴지통에서 억울해 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녀는 그렇게 나의 혼란스런 시간을 야무지게 구겨서 휴지통에 처넣어 버린 것 같다. 또 다시 시작이다. 그녀에 대한 목마름이 화가 되어 끓어오른다. 그 화가 어느 순간 그리움으로 ........다시 두려움으로 바뀌었다가 간절함으로 ....... 이쯤 되면 중환자다. 나는 병을 얻은 것 같다. 치유할 수 없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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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기가 되어 그 털보 아저씨를 찾아갔다. 아직 줄리아는 다녀가지 않았고 그녀에게 온 우편물도 없다고 했다. 난감해 하는 내가 딱해 보였는지 같이 잘 다니던 여학생이 아직 기숙사에 있으니 만나서 얘기해 보라 했고 다행히 그녀가 다니는 학교와 그녀가 아르바이트를 한다는 ‘알레로벨로’라는 이름의 이탈리안 레스토랑의 주소를 얻을 수 있었다. 나는 곧장 그 레스토랑을 찾아갔고 아직 그녀가 도착 하지 않았음을 확인했다. 창가의 테이블에 앉아 언제 쯤 나타날지 모를 그녀를 찾기 시작했다. 레스토랑 위치가 사거리 코너에 위치해서 밖이 훤히 보였다. 신호등으로 몰려드는 사람들이 모였다가 흩어지기를 여러 번 지켜보던 사이에 길 끝 모퉁이를 돌아 나오는 그녀가 보였다. 잘 못 볼 수가 없다. 분명히 그녀다. 머리는 대충 틀어 올린 듯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리고 있었고, 목도리 속에 얼굴을 반쯤 묻어 바람을 여미고 총총히 걸어오고 있었다. 걸어오는 동안 마주치는 지인들과 웃으며 인사하고 잠시 서서 이야기도 하느라 지척인데도 시간이 걸렸다.
‘도대체 몇 놈이랑 인사를 하는 거야? 저렇게 막 웃으면 난 어쩌라고........’
문이 열리고 그녀가 들어왔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레스토랑 손님들을 슥 훑어보는 듯 했다. 나를 알아보지 못했나보다. 직원용 사무실로 향하던 그녀가 멈칫 거리다가 들어가 버렸다. 나는 다시 그녀가 나올 때까지 기다렸지만 30분이 지나도록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초조해진 나는 다른 종업원에게 물었다. 좀 전에 본 그녀와 얘기하고 싶다고...... 그녀가 몸이 좋지 않아 오늘은 쉬겠다며 돌아갔단다.
‘이런... 나를 알아보았구나.’
허탈함에 레스토랑을 나와 주변을 돌아보았다.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이렇게 까지 하는 그녀를 나는 왜 놓지 못하고 미련퉁이로 서성이는지....... 그때 신호등 건너에서 나를 보고 있는 그녀가 눈에 들어왔다. 아까와는 다르게 털모자를 쓰고 목도리는 둘둘 말아 얼굴이 거의 다 가려져 있었지만 분명히 연주였다. 신호등이 켜지기를 기다리는 동안 그녀가 혹시 사라져 버리지 않을까 조바심이 나서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다행히도 그녀는 그 자리에 서있었다. 내가 길을 건너와 그녀에게로 다가 갈 때 까지도 그녀는 여전히 길 건너를 응시 하고 있었다. 그녀의 옆얼굴을 바라보며 건넬 말을 찾고 있을 때 그녀는 나를 지나쳐 걸어가려 하고 있었다.
“ 설마, 이렇게 그냥 가려고?”
“ ...................... ”
“ 금방 알아보고도 모른 척 나와 버린 거잖아, 너. ”
“ 사람 잘못 보셨어요.”
“ 사람을 잘못 봤다고? 내가 널 못 알아 봐? ”
“ 네, 분명히 잘 못 보셨어요.”
“ 그런 억지를 쓰는 이유가 뭐야?”
“ 많이 닮은 사람을 아시나보네요.”
“ 그럼 어떻게 해? 물어 볼 수가 없잖아. 물어 보고 싶었어. 그렇게 말없이 떠나버린 이유를 ... ”
“ 전 당신이 찾는 사람이 아닙니다. ”
“ 정말 너무 하네. 그래, 날 모른다고 치자. 상관없어.”
“ .........”
“ 죄송합니다. 찾는 사람과 너무 닮아서 제가 실수를 했나 보군요, ”
“.........”
“ 초면에 실례가 많았습니다. 사과의 뜻으로 저녁을 사고 싶습니다. 혼자 밥 먹는 걸 너무 싫어해서 그러는데 같이 밥 먹으러 가죠.”
“ ...............”
어찌할 줄을 몰라 하는 그녀가 안쓰러웠지만 나를 모른 체 하는 것이 화가 나서 배려하고 싶어지지는 않았다. 어떻게 이곳 까지 찾아 왔는데 나를 모른다고 하다니 괘씸하여 원망이 커졌다. 배고픈 줄 몰랐으나 말을 뱉고 나니 죽을 것 같은 허기가 몰려들었다.
“ 진짜 배고픈데...... 그래서 더 화가 나고 참기 힘들어집니다.”
“ ...........................”
“ 더 이상은 도망칠 곳도 숨을 곳도 없을 거란 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 여전하시네요. 하나도 안 변했어요. ”
“ 이제야 알아보는 군.”
“ 놀라서 ........ 많이 놀랬거든요. ”
‘ 나는? 나는 안 그렇겠어? 오늘도 널 못 만나는 건 아닌가 싶어 돌아버리는 줄 알았다구’
“ 추워요? 난 좀 걷고 싶은데.......”
“ 나 진짜 배고파........ 오늘 아무것도 안 먹었거든.”
“ 아까 거기서 뭐라도 먹지 그랬어요? 꽤 오래 있었다면서 ”
“ 빈속에 커피만 마셨더니 속이 쓰리고 아파.”
“ 저기 모퉁이 돌아가면 한식당 있는데 거기갈래요?”
“ 일부러 나 안보고 말하는 거야? 네 얼굴 제대로 보려면 나 다시 길 건너로 가야해?”
화가 났다. 내 목소리에 서운함이 묻어났을 텐데 그녀는 대꾸도 없이 모퉁이를 향해 돌아서 걷는다. 어이가 없다. 화를 누그러뜨리고 다시 그녀를 막아섰다. 그래도 그녀는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지 않았다.
그대로 정면을 응시했고 나는 그녀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었지만 그녀의 눈은 나를 향하고 있지 않았다.
“ 나 좀 봐봐. ”
“................”
“ 나 많이 변했어. 그대로라고? ”
“ 네.....”
“ 연주야, 너 잘 못 본거야. 다시 봐봐. 얼마나 변했는지 좀 보라구.”
목이 메어 왔다. 눈길조차 주지 않고 걷는 그녀가 낯설었고, 그녀가 만들어 버린 유리벽에 부딪혀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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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몸살기운이 있는 것 같아 몸이 무거웠다. 목도 부었는지 뭘 먹기가 불편해서 아침을 대충 먹고 오전 내내 침대에서 뒹굴뒹굴 했다. 아르바이트 시간이 되어서야 일어나 내려와 보니 할머님은 거실에서 옆집할머니와 뜨개질을 하고 계셨다. 인사를 하고 나와 보니 날씨가 제법 쌀쌀했는데 공기가 상쾌해서 좀 걷고 싶어졌다. 알레로벨로까지 걸으면 1시간은 족히 넘을 텐데 그럴 수 있는 몸 상태가 아니니 걷다가 버스나 전철을 이용할 맘으로 차고를 그냥 지나쳐 걸었다. 레스토랑일은 오늘 쉬어도 되었지만 케이티의 부탁도 있고 오늘 새로 만든 메뉴의 시식을 부탁한 쉐프님 파올로와 약속이 있어서 다녀와야 했다. 케이티가 유럽에 있는 동안 알레로벨로의 운영을 맡은 책임을 다하느라 잔소리 쟁이가 되셨다. 처음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을 때 실수가 많아 많이 혼나기도 했지만 요즘은 시식을 핑계로 근사한 음식을 차려주신다. 살이 너무 많이 빠져서 처음보다 못생겨 졌으니 많이 먹기를 권하고 맛있게 먹는 모습이 젤 예쁘다고 하는 분이다. 오늘처럼 기운 빠진 모습으로 나타나면 또 잔소리를 양념으로 한상 주르르 차려주실 것 같다. 처음에는 쉐프님이 잘 웃지 않고 늘 인상을 쓰니 화난 것 같은 표정이어서 다가가기 무서웠다. 차츰 친해지고 보니 북극곰인형 같이 귀엽고 유머러스하고 다정한 분인 걸 알게 되었다. 먹을 것을 자꾸 주셔서 내가 마음을 푹 놓고 경계심을 밀어내버린 것 때문일지 모르지만 .......
알레로벨로의 문을 밀고 들어서니 역시 쉐프님이 젤 먼저 윙크로 인사하신다. 손님이 꽤 있는 것 같아 무심히 둘러보고 주방 쪽으로 가려다가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듯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 확인할 용기가 나지 않아 유리에 비친 모습으로 다시 살폈다. 그였다. 오늘은 정말 아침에 눈뜨고 지금껏 그를 떠올리지 않을 수 있었는데....... 그가 여기에 와 있다. 어지러웠다. 겨우 발걸음을 옮겨 내실로 들어와 앉았다. 걱정 하시는 쉐프님께 양해를 구하고 식자재를 옮기는 뒷문을 통해 밖으로 나왔다. 그가 어떻게 여기에 왔을까? 여행을 온 걸까? 어떻게 이곳에...... 이런 우연이 있나? 블록을 돌아서 알레로 벨로 앞쪽으로 왔다. 창가에 앉아 있는 그를 멀리서 다시 보기 위해 길 건너편으로 와 가로등 기둥 뒤에 섰다. 내가 아무리 살이 빠졌대도 가로등으로 가려지지 않겠지만 그래도 그 뒤에 서는 것이 두려운 마음에 위로가 되었다. 창가에서 사라진 그가 레스토랑을 나와 허둥대듯 두리번거린다. 설마....... 우연이 아닌 걸까? 나를 찾아 온 거라면? 어쩌지?
그가 나를 보고 말았다. 내게로 다가왔다. 나....... 아무렇지 않아야 하는데...... 가슴이 저려온다.
내게로 다가오는 그를 지나쳐 나도 걸어가야 했다. 그는 그렇게 스쳐가는 나를 막아섰고 나는 다시 비켜 걸었다.
“ 설마, 이렇게 그냥 가려고?”
‘ 그대로네요. 금방 알아봤어요. ’
“ 금방 알아보고도 모른 척 나와 버린 거잖아. 너 ”
“ 사람 잘못 보셨어요.”
“ 사람을 잘못 봤다고? 내가 널 못 알아 봐? ”
“ 네, 분명히 잘 못 보셨어요.”
“ 그런 억지를 쓰는 이유가 뭐야?”
“ 많이 닮은 사람을 아시나보네요.”
“ 그럼 어떻게 해? 물어 볼 수가 없잖아. 물어 보고 싶었어. 그렇게 말없이 떠나버린 이유를 ... ”
“ 전 당신이 찾는 사람이 아닙니다. ”
“ 정말 너무 하네. 그래, 날 모른다고 치자. 상관없어.”
“ .........”
“ 죄송합니다. 찾는 사람과 너무 닮아서 제가 실수를 했나 보군요, ”
“.........”
“ 초면에 실례가 많았습니다. 사과의 뜻으로 저녁을 사고 싶습니다. 혼자 밥 먹는 걸 너무 싫어해서 그런데 같이 밥 먹으러 가죠.”
“ ........”
당혹스러웠다. 얼굴은 너무 화끈거리고 머릿속에서는 윙윙 어지러운 소리가 점점 크게 울렸다.
“ 진짜 배고픈데...... 그래서 더 화가 나고 참기 힘들어집니다.”
‘ 이젠 많이 지운 줄 알았는데 ....... 아니었네요.’
“ 더 이상은 도망칠 수 없을 거란 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 여전하시네요. 하나도 안 변했어요. ”
“ 이제야 알아보는 군.”
“ 놀라서 ........ 많이 놀랬거든요. ”
“ ..................”
“ 추워요? 난 좀 걷고 싶은데.......”
“ 나 배고프다........ 오늘 아무것도 안 먹었나봐.”
“ 아까 거기서 뭐라도 먹지 그랬어요? 꽤 오래 있었다면서 ”
“ 커피 마셨어.”
“ 저기 모퉁이 돌아가면 한식당 있는데 거기갈래요?”
“ 일부러 나 안보고 말하는 거야? 네 얼굴 제대로 보려면 나 다시 길 건너로 가야해?”
‘ 어쩌지?.........’
“ 나 좀 봐봐. ”
‘ 당신을 바로 볼 자신이 없어요. 지금도 벌벌 떨려서 주저앉아 버릴 것만 같은데........’
“ 나 많이 변했는데....... 그대로라고? ”
“ 네.....”
“ 연주야, 너 잘 못 본거야. 다시 봐봐. 얼마나 변했는지 좀 보라구.”
아까 뒷문으로 나왔을 때 그대로 돌아갔어야 했다. 우연히 그가 그 자리에 있었다고 생각했다. 그런 우연도 무서워서 피하려 도망쳐 나왔으면 뒤돌아보지 말았어야 했다. 한 번 더 그의 모습을 보려 했던 것이 잘못이었던 것이다. 나를 찾아온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그를 다시 보고는 지우려 밀쳐둔 마음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와 한 동안 견뎌낸 시간들을 모두 헝클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