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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찌개를 시켜놓고 음식이 나오길 기다리는 동안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도 오도카니 앉아서 물잔 만 바라보다가 창밖으로 시선을 옮겨 여전히 옆얼굴만 보여주고 있었다. 좀 마른 것 같았다. 옆모습이라 그런가? 별로 달라진 것 없어 보였다. 웃지 않는 것만 빼고....... 아까 다른 사람들한테는 방긋방긋 잘도 웃고 인사 하더만.......
음식이 나왔다. 오랜만에 먹는 한식이다. 그녀는 먹으라는 말도 않고 공기밥의 뚜껑을 열어 반 이상이나 덜어 나에게 밀어놓고는 께작께작 밥알을 세듯 먹기 시작했다. 나도 조용히 찌개국물부터 덜어 그녀에게 건네 놓고 먹기 시작했다. 배고프다는 말을 꺼낸 후 허기를 느꼈지만, 이곳으로 오는 동안 연주 얼굴만 살피느라 배가 고픈 줄 잊었었다. 그런데 밥을 보니 급격히 허기가 밀려왔고, 열심히 먹었다. 정말 둘이 마주 앉아 먹기만 했다. 나는 맛있게 먹는데 그녀는 여전히 께작께작.......
밥을 다 먹고 나니 이제 그녀에게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고민되기 시작했다. 식당을 나와 거리를 걸었다. 마주 앉아서 옆얼굴만 보는 것 보다 나란히 걸으며 이야기 하는 편이 덜 서운할 것 같기도 했다. 그녀가 먼저 말을 꺼냈다.
“ 미국엔 언제 왔어요?”
“ 작년에........ 크리스마스 전에 왔어.”
“ 꽤 되었네요. 여행 온 건 아닌가 봐요?”
“ 해외영업팀으로 파견근무 나왔어. ”
“ 여기 샌프란시스코에 지사가 있는 거예요?”
“ 아니, 시애틀에 .......”
“ 그럼 여긴 관광차 온 거군요.”
나는 그렇다고 해야 할지, 사실은 너를 찾아 온 것이라고 해야 할지, 순간 고민하다가 가이드 해주겠냐고 되물었다. 그녀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거절했다. 하는 일이 바빠 시간도 나질 않지만 그러고 싶지도 않다고 매정하게 잘라 말했다. 더 이상 물러설 수는 없었다.
“ 2년이 넘었어.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
“ 힘들었어요. 바쁘게 살면서 적응했구요. ”
“ 난 아직 적응 못했어.”
“ 온지 얼마 안 되었다면서요. 곧 적응할 거예요.”
“ 그런 뜻이 아닌걸 알텐데......”
‘...........’
“ 네가 떠났다는 걸 인정하는데도 오래 걸렸어”
‘ ..........’
“ 날마다 네가 돌아오지 않을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싸워야 했어.”
‘...........’
“ 왜 한마디 말도 없이 .....”
“ 그만....... 그게 중요한가요? 무슨 의미가 있다고............... ”
“ 그래, 나중에 하자. 이제 만났으니 천천히 .......”
“ 잊어요. 나처럼...... 다 잊어요.”
“ 너처럼? 그렇게 떠나놓고 묻지도 말라더니 다 잊어?”
“ 네. 지웠어요. 묻었다고 해야 하나? 여하튼 옛날이야기처럼 가물가물....... 잊었어요.”
“ 뭘 잊어? 왜 그래야 하는데? 내 눈도 똑바로 처다 보질 못하면서 잊었다고?”
화가 나 멈춰선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그녀는 계속 걸었다. 성큼성큼 걸어 그녀의 팔을 거칠게 잡아 돌려 세웠다. 그 바람에 그녀의 털모자가 벗겨져 바닥에 떨어지고 모자 속에 숨어 있던 그녀의 머리가 쏟아져 헝클어졌다. 헝클어진 머리가 그녀의 얼굴을 가려버렸다. 떨어진 모자를 줍기 위해 허리를 굽히던 그녀가 그대로 쪼그려 앉았다. 그녀를 일으켜 세우려 다가앉아 그녀의 어깨를 잡아 얼굴을 바로 보게 했더니 그녀가 눈을 감으며 말했다.
“ 겁나서 못 봐요. 다 잊었는데 당신 눈을 보면 다시 기억날까봐......”
“ 뭐가 두려운거야? ”
“ 떠오를 기억들 모두........”
“ 떠올리기조차 두려운 괴물인거야? 내가?”
“................”
“ 얘기를 해. 말을 해야 알거 아냐? ”
“................”
“ 그렇게 계속 눈감고 있으면 입 맞출 거야.”
그녀가 내 목을 감아 안겨왔다. 그녀가 내 품안에 있다. 울컥 목이 메어 왔다.
“ 규영씨, 그만....... 멈춰요. 오지마.......”
“ 내가 변할게, 뭐든 네가 원하는 대로 다 할게. ”
“ 아니요, 그럼 안 돼요.”
“ 싫어. 밀어내지마.......”
“...............”
“ 아무도 네가 어디 있는지 알려주지 않았어. 네 친구들도, 어머님도.......”
“.............”
“ 내가 여기 네 앞에 다시 서기가 쉬웠을 것 같아? 이제야 겨우 찾았는데 멈추라니....... 싫어. 못해.”
“ 시간이 더 흐르면....... 그래서 좀 편안해 지면....... 그때는 친구해요.”
“ 미쳤어? 난 너랑 친구 안 해. 이렇게 꽉 안고 절대로 안 놔 줄 거야.”
그녀를 안은 내 팔에 힘이 들어갔다. 놓쳐버릴 것 만 같아서 두려웠다. 너무도 담담히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함을 넘어서 차가운 얼음조각이 되어 가슴에 와 박혔다. 가슴에 박힌 얼음 조각이 온몸을 얼어붙게 만들어 버릴 것 같았다. 차라리 이렇게 그녀를 안은 채로 같이 얼어붙어 버리는 게 낫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녀가 나를 잊었든지 아직 잊지 못했든지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품에 안긴 그녀는 금방이라도 공기처럼 사라져 버릴 것 같았고 허우적거리며 헛손질을 하는 내가 보이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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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머니, 할머니”
“ 좀 쉬라했더니 말 안 듣고 기어이 다녀왔네, 이 고집쟁이 아가씨야.”
“ 네, 할머니 말 들을걸 그랬어요.”
“ 많이 힘들구나....... 그러게 쉬라니까.......”
“ 말 안 들어서 벌 받나 봐요.”
“ 벌? 벌은 무슨......”
“............”
“ 연주야?”
그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와 할머니를 뵈니 서러움이 밀려 왔다. 애써 아닌 척 어리광을 부리며 할머니 무릎을 베고 누웠다. 결국은 참았던 울음을 쏟아내고 말았다. 할머님은 그저 들썩이는 나의 등을 천천히 쓸어주실 뿐 아무것도 묻지 않으셨다. 쏟아 내야할 만큼 쏟아 내도록 .......
그와 나는 각기 다른 말을 했었다. 나도 그도 서로의 말은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스스로가 내뱉는 말만 제 귀로 듣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나는 계속 그에게 다가오지 말라고 했고 그는 쉼 없이 내게 걸어오겠다고 했다. 결론은 없었다.
시애틀로 돌아가는 그에게 연락처를 주지 않았다. 그도 다음 주에 다시 알레로벨로에 오겠다고만 했다.
나는 아마도 이번 주가 너무 길어 지칠 것이다. 그가 나타날 때까지 알레로벨로에 좀 더 오래 있으려 할 것이다. 그러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마음을 달래도 내 마음이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 다시 숨을 곳을 찾아야 할지 모른다.
그저 나의 등을 쓸어주시던 할머니께서 말씀을 하셨다.
“ 뭐가 연주를 그리 힘들게 하는 걸까?”
“ 할머니, 뭐가 맞는지 모르겠어요.”
“ 억지로는 안 되는 거야. 그냥 뭐든 흐르는 데로 두어, 어디서 고여 쉬었다가도 다시 흐를 수 있으니........ 이만큼 살아보니 그렇더라....... 억지로 막아도 기어이 터져 넘쳐서 제 길로 흐르더라구....... 물이 흐르듯, 시간도 흐르고, 그렇게 마음도 흐르는 거야.”
“ 단단히 막으면요? 거대한 댐처럼 꽉 막아버리면요? ”
“ 단단히 막기까지 얼마나 괴로울까? 갖은 애를 써야겠지......정답은 없어. 지나고 나면 아쉬웠던 순간이 후회로 남지. 후회 없는 삶이 있을까? 후회가 남아도 살아야 하니까. 살아지니까.”
“ 바라보고 있으면 더 아픈 사람이에요. 내 맘속의 가시가 자꾸 자라나 나를 찔러요. 그게 너무 아파서 지우려 도망쳤는데, 그것도 허락되지 않아요. 어떻게 해요? 내가 왜 아픈지 그에게 말할 수도 없어요. 그저 잊고, 잊히길 바랐는데.......”
“ 말할 수 없다고? 왜?”
“..............”
“ 그게 뭔지 난 잘 모르지만 ....... 연주야....... 다시 생각해 보렴.”
“ 소용없어요. 서로에게 더 상처만 될 거예요.”
“ 말하고 나면 어떻게 될 것 같은데? 자존심 때문인 건가? 아니면 정말 잊혀질 까봐 그러는 걸까? ”
“ 할머니......”
“ 서두를 것 없어. 섣불리 결정짓고 매듭지으면 훗날 그 매듭을 다시 풀어야 하는 시간을 또 견뎌야 할 수도 있으니까.”
“ 할머니......”
“ 아프면 아프다고 하고, 힘들면 힘들다고 해, 그렇게 네 마음을 잘 들여다보는 게 중요해.”
“.................”
“ 이쁜 나이잖아. 뜨거운 심장을 가진........ 천천히 충분히 느낀다 해도 지나고 나면 순간이더구나. ”
할머님의 나이쯤 되면 다 지난 일이라고, 그때는 그랬었노라고, 기억해도 아프지 않게 될까? 내 마음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혼란스럽기만 하다. 그저 그가 멈춰주기를 바랄 뿐이다. 내 상처를 드러내 그에게 보이기도 싫고 그렇게 그에게도 상처를 주고 싶지 않다. 그를 떠나 그가 없는 다른 시간을 살다보면 아팠던 상처들이 모두 치유되리라 믿었었다. 지금에서야 그 믿음이 헛되고 부질없었다는 것을 알아버렸다. 이제는 아물어 나은 줄 알았던 상처가 여전히 아프고 따가운데, 아프지 않은 척 외면하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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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보다 좀 야윈 듯 보이는 그녀의 얼굴을 제대로 못 보고 돌아가는 것 같다. 혹시 연락처를 물었으면 그녀가 알려주었을까? 물을 수가 없었다. 나의 눈길조차 외면하는 그녀에게 그저 다시 오겠다는 나의 다짐만 쏟아 놓을 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녀가 탄 버스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혹시 버스 안에서 나를, 나의 마음을 보고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이라도 가져야 했다. 되돌아오는 길은 얼마나 멀고 길던지 발걸음 옮겨 놓기가 쉽지 않았다. 더구나 허기진 마음은 채울 방법이 없기에 혼이 나가버린 사람처럼 헤매고 있었다.
빈껍데기로 돌아온 시애틀 쉐어 하우스에는 정민선배가 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래 기다렸냐는 일상적인 인사도 건네지 않고 그대로 침대에 누워버렸다.
“ 나 안보여?”
‘..............’
“ 대놓고 투명인간 취급하는 거네?”
“ 봤어. 외간남자 방에 막 들어와 있는 아줌마.”
“ 야! 어디서 뭘 했기에 전화도 안 받고 메시지도 무시하는 거야?”
“ 사생활.”
“ 어? 그러시겠다? 이제 난 니 사생활이 아니란 거네?”
“ 뭐지? 내 사생활 속에 살고 싶어졌어?”
“ 설마, ”
“ 헷갈리게 하지마, 선배. 나 흔들지도 말고, 기운 없어.”
“ 흔들어 봐? 흔들릴 것 같아?”
“ 휘청거릴 지도........”
“ 정신차려, 나 나쁜년 만들지 말고.”
“ 선배가 왜 나빠? ”
“ 뭐가 그렇게 힘든 건지 모르겠지만 나 때문은 아닌 것 같네. 쉬어.”
“ 가려고?”
“ 어, 차 한 잔 마실까 했는데, 그냥 가야겠다.”
“ 차 마시고가.”
“ 갈게, 내일 출근해서 보자.”
“ 선배, 가지 말라고 붙잡아도 돼?”
침대에서 일어나 포트에 물을 올리며 툭 던진 말 한마디에 방을 나가려던 선배가 멈춰 섰다. 돌아보지 않는다. 내게 등을 보이고 떠났던 첫 번째 여자.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 투정부리듯 백허그를 했다. 그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같이 있어 달라고 말했다. 위로받고 싶었다. 그대로 잠시 등을 내어주던 그녀가 나의 팔을 풀고 돌아섰다. 나의 얼굴을 올려다보는 그녀의 눈빛은 나를 밀어내던 연주의 표정과 묘하게 닮아있었다. 조심스레 다가가 입 맞추려 해도 피하지 않아 오히려 내가 당황스러워 졌다. 머릿속이 아득해지더니 오래도록 짝사랑으로 가슴앓이 했던 시간들이 빠르게 스쳐지나 갔다. 뜻밖이라 머뭇거리던 나에게 선배가 다가왔다. 서글퍼졌다. 이대로 나의 첫사랑까지 망가뜨릴 수는 없었다. 그녀의 입술을 피해 이마에 입 맞추니 그녀가 쓸쓸하게 웃었다. 그 모습을 외면하고 나는 무심한 듯 돌아서 차를 준비해 그녀에게 건넸다.
“ 한번쯤은 확인하고 싶었어. 이젠 내가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 나에게 미안했었어?”
“ 어, 네 생각이 나면 그저 미안하다는 말이 맴돌았거든.”
“ 내가 선배 마음속에 그렇게 불쌍하게 들어앉아 있었다니 실망이네.”
“ 불쌍하긴, 늘 고맙고 멋있는 친절한 후배였지. 내가 흔들리고 싶었던.......”
“ 좀 흔들리다가 쓰러지기도 하지 그랬어? ”
“ 그러게, 그랬으면 네가 좀 덜 보고 싶었을까? ”
“ 이제와 후회하는 거야?”
“ 후회는 무슨, 아냐!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을 뿐이야. 문득문득 그리울 때가 있었어.”
“ 내가 그리운 게 아니라 그때 그 시간이 그리웠던 건 아니구?”
“ 그런가? 어쩌면....... 그럴 수도 .........”
“ 딴 놈 때문에 우는 선배 앞에 늘 내가 있었으니까. 그 술주정 다 받아주고........”
“ 그래, 네가 업고 집까지 데려다 준 날이 셀 수도 없었다는 것도 알지.”
“ 그 때는 그것 밖에 해 줄 수 있는 게 없었고 더 바랄수도 없었는데 뭘.”
“ 너 좋다고 하는 애들도 많았던 것 같은데 왜 하필 나를 바라보느라 그랬는지......”
“ 그러는 선배는 내가 그렇게 좋아하는 거 알면서 눈길도 안 줬잖아.”
“ 하긴, 서로 마주보기가 된다는 건 정말 축복인거야.”
“ 지금은 행복해?”
“ 어때 보여?”
“ 좋아 보여, 안정되어 보이기도 하고.”
“ 맞아, 평온해. 에드워드는 함께 할수록 더 좋은 사람이야.”
“ 어떻게 만난거야? ”
“ 첫눈에 반했어. 그리고 날마다 반하지.”
“ 에?”
에드워드를 떠올리는 그녀의 표정에 빛이 난다. 사랑받는 여자의 행복한 미소가 예뻤다. 그 미소는 나에게 흔들리고 싶었다던 그녀의 말을 믿을 수 없게 만들지만 적잖이 위로가 되었다. 다행이다. 하마터면 평온한 그녀를 혼돈 속에 빠뜨릴 뻔 했다. 오늘 연주에게 다가서지 못했지만 나의 첫사랑은 빛나게 둘 수 있었다. 어쩌면 연주 앞에 마주서기 위한 나의 다짐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선배를 바래다주고 돌아오는 길에 축 늘어져 터벅터벅 걷는 나의 긴 그림자를 만났다. 가로등 아래 홀로 걷는 그림자에게 말한다.
‘ 힘내, 그래도 아주 형편없지는 않았어. 다시 제대로 시작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