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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알레로 벨로를 찾았다. 나 때문에 쉐프님의 입장이 곤란해 지셨을 것 같아 죄송하다고 말씀을 드렸다. 쉐프님은 도움을 주고 싶은데 연주의 마음부터 살펴주어야 할 것 같다고, 그렇게 돕겠다고 하셨다. 얼마 뒤 연주가 나타났다. 쉐프님께만 인사를 하고 나는 아예 투명인간 취급을 했다. 구겨진 내 자존심은 숨겨두고 먼저 인사를 건넸다. 그때서야 알아본 것처럼 말을 하는 연주의 연기가 어설펐다.
“ 어? 왔어요?”
“ 나도 여기서 일을 할까봐!”
“ 제 대신 일하실래요?”
“ 대신? 같이 일하고 싶다는 뜻이잖아.”
“ 저 곧 그만 두려고요. 하던 일이 바빠져서 시간이 부족하거든요.”
“ 무슨 일? 내가 도와줄까?”
“ 방해가 될 거라는 생각은 안 해 봤어요?”
“ 잊었어? 나 재주가 많잖아. 또 뭐든 빨리 배우고 항상 탁월한 성과를 만들어내는........”
“ 잊었다니까........그게 뭐든 남김없이 .......”
“ 다 보여. 모두 기억하고 있는 얼굴이야. ”
내가 잘못 본 것일까? 원망스런 눈빛이었다. 아주 잠시였지만 나를 보는 그녀의 표정이 그랬다. 내가 또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했나보다. 대꾸도 없이 나를 피해 안쪽으로 사라져 버렸다. 내가 여기 있으면 그녀는 다시 이곳으로 나오지 않으려 할지도 모른다.
“ 쉐프님 , 저 이만 갑니다.”
“ 벌써? 점심은?”
“ 가봐야 해요. 다음에 뵐게요.”
“ 잘 가........”
쉐프님 뒤 쪽으로 연주의 뒷모습이 보였다. 역시 돌아보지도 않는다. 내 시선에 쉐프님이 찡긋 윙크를 하시며 ‘불러줄까?’ 하는 도움의 뜻을 보이셨다. 나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사양의 뜻을 전했고 조금 더 연주의 뒷모습을 바라보고는 돌아 나왔다. 원망을 담은 듯 했던 연주의 표정이 마음에 걸렸다. 위로해 줄 수도 없고 웃게 해줄 수도 없는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이렇게 얼른 나를 숨겨주는 것뿐이다.
바쁜 척 나왔으나 딱히 갈 곳이 없었다. 시애틀로 돌아가는 티켓을 바꿔볼까 하다가 그냥 연주가 있는 이곳에 더 머물러 있기로 했다. 이제 겨우 1시가 되어가고 9시 40분 출발시간까지 꽤 여유가 있었다.
뭘 하는 게 좋을지 생각해 보다가 눈에 띄는 샌드위치 전문점에 들어갔다. 점심으로 먹을 샌드위치를 샀다. 함께 먹을 사람이 있다면 좋겠지만 혼자서도 느긋이 시간을 보내며 먹을 장소를 찾아보았다. 멀지 않은 곳에 알라모 스퀘어 파크가 도심의 고층이 한눈에 들어오는 높은 언덕에 자리하고 있었다. 경치가 좋았다. 답답한 숨통이 확 트이는 것 같은 시원한 느낌이 처진 나의 기분을 위로해 주는 것 같았다. 볕이 좋아 오랜만에 햇볕을 쫙 받아들일 수 있었다. 덕분에 나를 감싸고 있는 우울감을 조금은 날려버릴 수 있었다. 그리고 나서 나를 숨겨줄 만한 적당한 그림자가 있는지 둘러보니 커다란 나무들이 나뭇가지를 흔들며 서로 불러대는 것 같았다. 그 중에 가장 작은 나무 그늘로 가서 앉았다. 큰 나무 그늘은 혼자 독차지하기 미안하니 작은 나무가 좋았다. 바람이 적당히 불어 주었고, 그대로 벌렁 드러누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느긋함이다. 기분이 점점 나아지는 것 같았다.
따릉따릉 소리가 가까이 다가왔다가 멀어졌다. 연인인 것 같이 보이는 남녀가 나란히 자전거를 타고 지나고 있었다. 둘러보니 연인들이 많다. 부러운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서 기분이 다시 언짢아 졌다. 이런 마땅치 않은 기분을 배고픈 탓으로 돌리며 샌드위치를 꺼내 크게 베어 물었다. 그때 연인들 사이에 나처럼 외로이 앉아 책을 읽고 있는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옆에 세워둔 자전거가 햇빛에 반사되어 번쩍번쩍 나의 눈을 자극하고 있었다. 그녀가 들고 있는 커피향이 바람을 타고 날아 나에게로만 오는 것 같았다. 두근거리기 시작하는 나의 심장소리가 들렸다. 그녀만큼이나 예쁜 자전거에 반짝거리는 빛이 그녀의 얼굴을 비추었다. 이런 걸 한 폭의 그림 같다고 하는가 보다. 휴대폰을 꺼내어 내 마음에 담은 그림을 가두었다. 지루할 것 같았던 오후가 너무 빨리 지나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 조금만 더 있지....... 벌써 가려나?’
‘ 바라만 보아도 좋은 사람? 내게 그런 사람이 되었구나, 너는.......’
자전거를 끌고 걷기 시작하는 그녀를 눈으로만 쫓다가 나도 일어섰다. 천천히 걸었다. 그녀가 두 걸음 걸으면 나는 한걸음씩 걸었다. 오늘은 조금 덜 아프도록 그렇게 조금만 보아야 했다. 그렇게 점이 되어 사라지는 버리는 내 마음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해가 저물어 갈 때 즈음에서 언덕을 내려왔다. 다시 도심 속으로 들어와 공항으로 향했다. 먹다 남은 샌드위치를 쓰레기통에 던져 넣어버렸다. 갑자기 미치도록 그녀가 보고 싶어 졌다. 달려가 붙잡지 않고 그대로 보낸 것이 몹시 후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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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대하는 것이 두려워 피하기 바빴다. 그럴수록 그는 불쑥불쑥 나타나서 나를 당혹스럽게 했다. 그때 마다 나는 그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 같아 견딜 수가 없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를 멈추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 어긋나 버린 인연이라 더 이상 연인으로 남을 수 없다는 걸 그는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오늘도 불쑥 나타난 그를 모질게 밀어내고는 마음을 편치 않아 늘 걷던 길을 걸어 내가 좋아하는 나무를 찾아 왔다. 아빠 같은 나무, 그 아래서 쉐프님이 내려주신 커피를 마시며 읽다가 만 책을 꺼내 펼쳤으나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느새 흩어진 글자들은 그의 얼굴을 그려 놓아 버렸다. 한숨이 흘러 나왔다. 한 장도 넘기지 못한 채 책을 덮어버렸다. 나무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모든 생각을 거두고 쉬고 싶었지만 모든 기억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는 듯 했다. 막아낼 힘도 감당할 용기도 없다. 그래서 또 도망치고 숨는 것 밖에 못했는데 그는 불쑥불쑥 나타나서 그 것 조차도 더 이상 할 수 없도록 만들어 버린다.
눈을 감고 있으니 그 사람만 보여서 얼른 눈을 떴다. 공원을 찾은 많은 사람들 너머로 펼쳐진 하늘이 눈부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바람이 불어와 내게 머물고 나뭇잎이 사각거리며 나를 달래 주었다. 괜찮다. 그리움은 그리움으로 그냥 두고서라도 이별을 해야지........ 그래야지.......
할머님께서 전화를 하셨다. 돌아오는 길에 식빵을 사다 달라고 하셨다. 자전거를 늘 다니던 베이커리 앞에 세워두고 들어갔다. 주인아주머니께서 할머님의 안부를 물으셨다. 할머님께 갖다 드리라며 덤으로 쿠키도 넣어 주셨다.
저녁식사를 마친 후 할머님과 차를 두고 마주 앉았다. 덤으로 얻은 쿠키가 잘 어울렸다.
“ 이집 쿠키는 언제 먹어도 맛있단 말이야. 내가 47년이나 먹었는데 질리지도 않아.”
“ 그렇게 오래된 가게인지 몰랐어요.”
“ 훨씬 오래 되었지. 할머니의 가게를 아들이 이어받고 또 그 딸인 지금 사장이 물려받아서 하는 거란다. 그 할머니는 못 보았지만 그 아버지는 잘 알지.”
“ 그래도 한결같은 맛이라니 멋있네요.”
“ 한결 같다는 것, 그게 매력이지. 변하지 않는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건데.......”
“ 한결같은 것이 너무 힘들어 바꾸고 싶은데 못하는 것도 있어요.”
“ 그게 또 매력이 될 수도 있지. 안 그래?”
“ 할머니는 다 좋다고 하시네요?”
“ 그럼 다 좋지....... 세상이 자꾸 변하잖아. 사람도 변하고 다들 쉽게 바꾸고 또 금방 적응하잖아. 그것도 좋아. 새로운 쿠키 맛도 좋으니까.......”
“ 뭐가 더 좋으세요?”
“ 변해서 좋은 것도 당연히 많지만 쿠키 맛은 변하지 않아서 더 좋아. 오래전 같이 먹었던 사람들과의 추억이 고스란히 떠오르거든. ”
“ 좋은 기억만 떠오르세요?”
“ 좋았던 기억 끝에 슬픈 기억이 따라 나오고 또 다시 기쁜 일이 떠오르다가 아픈 기억이 보이기도 해.”
“ 저는요. 그 아픈 기억이 무서워요.”
“ 나도 그렇단다. ”
할머님과 차를 나누는 시간동안 나의 마음은 더욱 확고해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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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동안 회사일이 바빠 연주에게 가 볼 수 없었다. 세프님께 안부 전화를 드린답시고 은근 연주의 소식을 흘려들을 수 있을까 기대했지만 전혀 들리지 않았다. 부러 물을 수도 없었다. 조심스런 세프님의 목소리가 고스란히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답답한 채로 버틸 수밖에 없었다. 사실 컨디션이 좋지 않아 일하면서도 능률이 잘 오르지 않았고 쉬 피로를 느꼈다. 점점 예민해 져 짜증과 불만도 늘어만 갔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괜히 불편하게 하기 싫어서 퇴근 후 혼자 있는 시간에 업무를 처리하는 날이 늘었다. 마치 벌을 받는 듯이 해야 할 일들을 묵묵히 했다. 벌이 너무 힘들 땐 휴대폰 속에 담긴 연주를 꺼내어 보았다. 책을 응시하던 연주가 고개를 들어 웃어주기를 얼마나 바랐는지 모른다.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나를 정민선배는 ‘그냥멍청이’라고 불렀다.
“야, 그냥 멍청이, 정신차려.”
“..........”
“ 자는 거야? 눈 뜨고?”
“ 꽤 괜찮은데?”
“ 뭐가? 내 머리스타일? 더워서 좀 많이 잘라냈어.”
“ 어, 그랬구나.”
“ 엥? 못 알아 본거야? 그럼 뭐가 괜찮다는 건데?”
“ 그냥 멍청이”
“ 그게 너야”
“ 응, 괜찮다고........”
‘그냥 멍청이’딱 이었다.
선배가 ‘그냥 멍청이, 밥먹으러가자.’ 하면 그냥 멍청하게 따라가서 시켜주는 대로 먹으면 되었고, ‘그냥 멍청이, 좀 쉬면서 일해’ 그러면 또 손 놓고 멍하니 멍 때리고 있으면 되었다. 정민선배의 표정은 영 마뜩치 않아 보였지만 나는 맘에 들었다.
여름이 시작되었다. 긴 휴가를 누리기 위해 모두들 떠날 채비를 하는 것 같았다. 고향에 다녀오려는 사람들도 많았으나, 대부분 좋은 사람들과 여행을 준비하는 것 같았다. 나만 빼고 활기가 넘쳤다. 여름이 시작 되듯 자연스럽게 연주와 나도 시작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곁을 주지 않는 연주가 두려웠고 나의 여름은 시작도 않고 겨울로 넘어가 버릴 것 같은 서늘함이 배어 있었다. 조급해졌다. 여름을 놓아버릴 수 없는 일이었다. 휴가 내내 샌프란시스코에서 보낼 요량으로 비행기 대신 자동차를 몰아 알레로 벨로로 향했다. 운전만 12시간 이상 걸리는 것을 감안하면 무리가 될 수도 있겠지만 아무 때고 불쑥 연주를 찾아내어 보고 싶은 만큼 실컷 보려는 욕심이 강하게 움직였다. 정민선배가 해안 쪽으로 달려가 보라고 추천했다. 가다가 이쁜 여자 발견하면 거기서 주저앉아 정착하고 돌아오지 말란다. ‘그러마’ 하고 나섰다.
이른 새벽 해 뜨기 전에 서둘러 출발했다. 탁 트인 바다를 따라 나 있는 도로를 계속 달렸다. 허기도 채우고 좀 쉬어가려고 들른 곳 마다 이쁜 여자들이 많았다. 노을빛이 가득한 저녁 즈음에 들른 곳에서는 이쁜 여자 하나가 혼자인 나에게 저녁을 같이 먹자고 다가왔다. 정민선배 말이 생각나서 웃음이 나왔다. 그 웃음을 오해 했는지 그 이쁜 여자가 갈색머리를 쓸어 넘기며 웃는다. 나는 손에든 샌드위치를 보이며 갈 길이 멀다는 표현을 하고 차로 돌아왔다. 손에 든 샌드위치를 ‘그냥 멍청하게’씹고 있는 내가 좀 불쌍했다. 맛이 없었다. 그냥 갈색머리랑 같이 먹을 걸 그랬나? 쓸쓸했다. 새빨갛게 물들어가는 바다와 하늘이 강렬한 만큼 더 쓸쓸했다. 넘실거리다 밀려들어오는 파도처럼 외로움이 나를 휘감아 버렸다. 이제 몇 시간만 더 달려가면 샌프란시스코에 닿는다. 어둠속을 달려서라도 연주에게 가 닿아야 했다. 나는 멈추어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