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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아래에서 명상을 하는 로봇
작가 : 유라
작품등록일 : 2020.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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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사문과 로봇] 7장 각성(2)
작성일 : 20-08-21     조회 : 313     추천 : 0     분량 : 28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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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침이 찾아오고도 다시 해가 뉘엿이 가라앉을 때쯤이었다. 태풍은 드디어 잠잠해졌다. 발룬다는 재앙이 지나간 자연 속에서 흙탕물로 온몸을 적신 채, 주변과 완전히 동화되어 있었다. 그때, 듬직한 손바닥이 발룬다의 작은 어깨를 어루만졌다. 존이었다.

 

 그는 비바람으로 엉망이 된 모습이었으나, 스승에 비하면 오히려 말쑥했다. 발룬다는 번뜩 정신이 들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존을 바라보았다. 발룬다가 비바람을 맞으며, 고행보다 고되었던 밤을 지새우며, 그리고 그리던 바로 그 아이의 얼굴이었다. 발룬다는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10여년 전 우타베나골에서 존을 처음 만났을 때와 똑같았다.

 

 “그래, 고생이 많았구나, 존. 오두막에 가서 채비를 하거라. 나는 오늘 첫 성욕을 해야겠다. 아침이 찾아오거든 나를 데리러 오거라.”

 

 노인은 사랑하는 아이를 등지고 연못을 향했다. 몸은 잘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다리를 쩔뚝거리며 나아갔다. 모든 관절이 욱신거렸지만, 존을 다시 보았기에 어젯밤처럼 상처가 아프지는 않았다. 노인은 천천히 주변을 바라보았다. 모든 것이 달라 보였다. 스산한 바람이 까진 살갗을 조심스럽게 스쳐 지나갔다. 완전한 새로움을 느끼던 젊은 시절처럼, 출가해서 처음 숲에 당도했을 때처럼, 모든 것은 달라졌다. 꺾인 나뭇가지 사이로 스미는 저녁노을, 바위 아래에 숨어 바들바들 떨며 재앙을 견뎌 낸 숲쥐도 달라 보였다. 강물과 바람, 바위와 잡초들도 새로웠다.

 

 그리고 마침내 연못에 도착했을 때, 매일 보던 연못도 달라져 있었다. 연못은 깨끗하고 투명한 원래의 물 대신 흙탕물을 품고 있었다. 연못의 가장자리에 가지런하게 놓여 있던 바위들은 질서를 잃고 여기저기에 흩어졌고, 그 옆에서 흐트러지게 녹음을 피우던 복숭아나무는 뼈만 남아 앙상하게 알몸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래도 연못의 표면은 오늘도 잔잔했다. 발룬다는 그 모습이 꼭 자신과 같아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하하! 성욕을 하기에는 너무나도 더러운 물이구나. 꼭 이 발룬다와 같다! 늙은 발룬다는 오늘 이 연못을 양수로 삼아 다시 태어나리라. 나 발룬다는 이제 아기다!”

 

 발룬다는 연못 앞에 정좌를 틀고 앉았다. 시큰하게 올라오는 발바닥의 통증을 꾹 누른 채, 발룬다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는 감은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다.

 

 

 ***

 그 세상에는 그 아이가 있었다. 순수하고 청순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 아이가 바로 그곳에 있었다. 발룬다는 그 아이의 깨끗한 눈동자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는 그 아이에게서 아름다움과 경외로움, 황홀함을 느꼈다. 그 아이는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줄을 몰랐다. 아이가 걷고 기는 것은 앙증맞고도 어색했다. 아이는 물을 마시고 소변을 보는 것조차 도움을 받아야 했다. 발룬다는 아무런 대가 없이 그 아이를 도왔다. 그는 젖과 빻은 곡물을 섞어 따뜻하게 데워 아이에게 먹이고, 아이의 대소변을 정성스럽게 닦아 주었다. 아이는 그런 발룬다의 은혜를 전혀 알지 못했고, 도리어 매일 밤마다 온 힘을 다해 울어서 그를 괴롭혔다. 그는 뜬눈으로 매일 밤을 지새웠다. 그 일은 힘들었지만,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그저 꼼지락대며 사랑받는 그 아이가 자신의 옆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는 충분히 보상받았다.

 

 아이는 금방 커 갔다. 자신보다도 훌쩍 키가 커 버린 아이는 발룬다에게 반항했다. 그는 툭하면 분노했으며 짜증을 냈다. 그러다가 때로는 이유 없이 기뻐하며 실성한 듯 웃기도 했다. 아이는 모든 것을 혼란스러워했다. 아이의 정서는 불안정했다. 아이가 불안하면 발룬다도 불안했다. 아이는 아무 말이나 내뱉으며 발룬다의 마음에 상처를 입혔다. 아이의 말은 가슴을 후비는 날카로운 가시 같았다. 아이가 반항 끝에 문을 박차고 밖으로 나갔을 때, 그는 그 방에 남아 분노를 삭히다가 문득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발룬다는 가끔 그를 완전히 쫓아내 버리고 싶다는 생각도 했지만, 그 아이를 결코 내칠 수 없었다. 발룬다는 엄하게 아이를 혼내기도 했고, 차분히 아이를 설득하려고 하기도 했지만, 그 어떤 방법도 성공하지 않았다. 그 아이를 키우는 일은 정말 버거운 일이었다.

 

 어떻게 그 시간이 지나갔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결국 질풍노도의 시기가 지나갔다. 아이는 장성했다. 아이는 영리하고 강하게 자랐다. 아이는 자신의 목적을 스스로 설정하고 나아갔다. 아이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아이는 눈앞에 닥친 적들과 싸웠다. 아이는 감히 대적할 수 없는 적과도 용감하게 싸웠고 다시는 일어날 수 없을 정도로 상처 입어도 다시 일어났다. 아이는 세계와 사람을 사랑하고, 그 사랑을 위해 고군분투했다. 발룬다에게 아이가 가진 대의와 사명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 아이가 무슨 영광과 명예를 취하든 좋았다. 그저 그 작은 영웅이 혹시나 다치지 않을까 늘 마음을 졸였다. 그게 늙고 노쇠한 그가 가진 욕망의 전부였다.

 

 그 아이를 만나면 온종일 잔소리를 했다. 그리하고 싶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저 그 아이를 보면 걱정스러움에 그런 말들이 수도 없이 나왔다. 그 아이가 잔소리를 듣다가 기어코 짜증을 내면, 괜스레 자신의 잔망스러움을 탓했지만 그것은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아이가 승리하여 그 위용을 뽐낼 때면, 저 아이가 승리했다고 여기저기 오두방정을 떨며 다녔다.

 

 시간이 또 지나갔다. 아이는 늙었다. 발룬다는 녹이 슬어 소멸하는,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그 아이의 모습을 안쓰럽게 쳐다봤다. 아이는 더 이상 용감한 전사가 아니었다. 아이는 눈이 멀고 손끝이 떨렸다. 아이는 음식을 잘 씹지 못하고 맛을 느끼지 못했다. 아이는 관절을 잘 펴지 못해 한쪽 발을 절기도 했다. 그 모습에 발룬다는 쓰라릴듯 아팠다. 그는 한참동안 미어진 마음을 추스리다가, 갑자기 껄껄대며 웃어 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웃음 속에는 울음이 섞여 어깨가 들썩들썩. 조금씩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리고 서러이, 밤이 새도록 엉엉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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