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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샤 - 사디스트 왕에게 복수하는 법
작가 : 재원이
작품등록일 : 202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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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 카라툰(1)
작성일 : 20-08-26     조회 : 303     추천 : 0     분량 : 5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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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레케이투가 북상을 서두른 이유는 신속하게 자신의 상관과 접촉하는 것 말고도, 외적인 요인이 더 있었다.

 북부와 서부에 걸친 대평원 ‘오로카라’에서 북상하면 툰드라지대가 나온다.

 한랭한 기후가 이어지는 곳이지만, 계절에 따라서 얼기와 녹기를 반복하는 땅.

 해빙기 때에는 땅이 진흙처럼 질퍽해져 말이 발목을 다칠 수 있었기에 한창 결빙기인 지금이 북상하는 데 최적이었다.

 

 쿠쿠추가 선물해준 설영군복을 입은 카야.

 복슬복슬한 털가죽 탓에 부피가 두 배로 불어난 몸을 보고서 신기해하며 뒤뚱뒤뚱 걸어보았다.

 휴식 중이던 부대원들은 소녀가 곳곳에 찝쩍거리는 것이 거슬렸는지 눈치를 주었지만, 카야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손바닥으로 땅을 짚으니 돌덩이처럼 단단하면서도 얼음처럼 차가웠다.

 하미드에서 봐왔던 부드러운 흙이 아니었다.

 느낌이 이상해 더듬더듬 만져보았다.

 

 “신기한가?”

 

 부대원들과 함께 모닥불을 쬐고 있던 에레케이투가 빨빨거리며 돌아다니는 소녀를 불렀다.

 카야는 복면을 쓴 여성을 찌릿 노려보더니 ‘흥!’ 고개를 돌렸다.

 어디서 친한 척이야?

 기둥에 결박당한 채 화살로 위협 당했던 기억이 앙금으로 남아있었기에 카야는 시위하듯 말을 섞지 않으려 했다.

 

 “저 꼬마 년이 노얀(부족장, 장군) 어른 말씀하시는데……!”

 

 옆에서 같이 쬐던 부하가 맘에 안 든다는 듯 성을 냈지만, 에레케이투는 별거 아니라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놔둬, 귀엽잖아. 어차피 저러다 풀려.”

 

 가볍게 토라지려 했던 카야는 그의 담백한 반응을 보고서 더욱 고집이 올라왔다.

 하렘에 있으면서 무시에는 익숙해진지 오래였지만, 무관심에는 내성이 없었기에 쉽게 악에 받혔다.

 어린애 취급하다니, 나중에 변신하게 되면 본 때를 보여줘야지.

 저 여자의 뜻대로 되진 않으리라 다짐하며 무시하는 시늉 겸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하늘도 짜증나게 먹구름으로 꽉 막혀있었다.

 

 “눈이 내리겠군. 오늘은 길게 가진 못하겠어.”

 

 카야의 등 뒤로 다가선 에레케이투는 금빛 눈동자로 하늘을 보며 중얼거렸다.

 

 “눈……?”

 

 쿠쿠추의 말이 생각나 그에게 물었다.

 스스로에게 한 다짐이 일각도 못가 깨져버린 것에 아차 싶었지만, 이미 때는 늦어버렸다.

 

 “왜, 궁금한가?”

 

 에레케이투가 대놓고 가늘게 눈웃음을 치는 탓에 카야는 자존심을 구겼다.

 

 “그, 그딴 거 나도 다 알거든? 차가운 솜 같은 거잖아!”

 

 소년병에게 들었던 말을 그대로 인용하는 것이었지만, 지금 당장은 반박하는 게 중요했다.

 

 “차가운 솜이라. 어린 아이 같은 낭만적인 비유군.”

 

 우씨! 또 무시했어!

 또 다시 놀림 당한 탓에 씩씩거리는 카야였지만, 에레케이투한테는 그 마저도 재롱이었다.

 어떻게 하면 빈틈을 보일까?

 복면의 여성을 주시하며 약점 찾기에 올인하고 있었는데 그쪽에서 먼저 말을 건넸다.

 

 “북부에 가면 너희 루크족을 만날 수 있을 거다.”

 

 순순히 대화에 응하지 않으리라 되새기며 그를 등진 채로 있는데, 하필이면 가장 궁금했던 주제가 나왔다.

 다행이도 그냥 들으라는 듯 그는 굳이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들은 초원세계를 유랑하며 살고 있지. 과거에 자신들이 이룩했던 제국의 역사를 뒤로하고 지금은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상태다.”

 “……어째서?”

 “우리 시르위족에게 패배했기 때문이다.”

 

 도발하는 말투는 아니었다.

 에레케이투는 따라붙는 감정 없이 그저 덤덤하게 사실을 전했다.

 하렘 밖으로 나오지 않았으면 알지도 못했을 일, 하지만 미리 알았다 해서 달라질 건 없었다.

 다만, 조금 씁쓸할 뿐이었다.

 

 “……왜 몰락한 거야?”

 “내가 알고 있는 건 우리 시르위가 어떻게 너희 루크에게 승리했는지 뿐. 너희 민족의 역사는 만나서 직접 들어라.”

 

 그저 말괄량이인 줄로만 알았던 소녀의 반응이 의외라 생각했는지 에레케이투 또한 덩달아 진지하게 되었다.

 패배주의에 빠지지 마라.

 그냥 과거를 직시해라.

 이것이 이면에 깔려있는 그의 의중이었지만, 더 부연해봤자 사족이자 참견일 뿐.

 에레케이투는 생각에 잠긴 카야를 두고 모닥불로 돌아갔다.

 소녀에게 혼자만의 사색이 필요할 거라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꽉 막힌 하늘을 올려다보는 카야.

 숨을 내쉬니 희끄무레한 콧김이 새어나왔다.

 따뜻하기만 했던 하미드에서는 경험하지 못했던 것…….

 배고프면 꼬르륵 소리가 난다는 것도, 지나치게 추우면 땅이 언다는 것도 모두 소녀에게는 새로웠다.

 소녀의 입김에 답하듯 무채색 하늘에서 몽글몽글한 덩어리가 내렸다.

 구름에서 떨어져 나온 그것은 마치 목화솜처럼 보였다.

 카야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함박눈을 향해 손을 뻗어보았다.

 허공을 떠돌며 바람을 타던 그것은 소녀의 손바닥에 닿자마자 녹아내렸다.

 

 “물이었네…….”

 

 직접 만져보면 알 거라는 쿠쿠추의 말이 들어맞았다.

 어찌 보면 간단한 결론이었지만, 직접 확인하지 않았으면 몰랐을 일.

 카야는 차갑게 방울진 눈의 흔적을 바닥에 흘려보냈다.

 

 이 세상은 카야가 알지 못했던 것 투성이다.

 노력을 한다 해서 전부 알아낼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다.

 하지만 개의치 않았다.

 방금처럼 모르는 게 있으면 직접 부딪히면 그만이었다.

 부딪히다보면 언젠가 아이샤를 구할 수 있는 방법도 찾을 수 있겠지.

 

 ‘기다려 아이샤…….’

 

 하늘에서 내리는 솜덩이를 올려다 보며 물기어린 손에 주먹을 쥐었다.

 

 ***

 

 엉거주춤 안장에 앉아 ‘추!’를 되뇌며 애마의 종종 걸음을 유도하고 있는 아이샤.

 말을 탈 때마다 느끼는 것이었지만, 발굽이 닿는 땅바닥까지가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실수하지 않으리라 속으로 되뇌며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허벅지에 힘을 주었다.

 아이샤가 오초막에 온 신경을 집중하는 사이, 시키르가 행렬의 후미에서 빠져나와 말을 걸었다.

 

 “어이, 아가씨. 상태는 좀 괜찮아?”

 

 고삐를 잡는데 집중하고 있던 탓에 그의 말을 듣지 못하고 있다가 무카가 알려 주어 한발 늦게 대답했다.

 

 “아, 걱정 마세요! 오초막이 워낙 기운이 넘쳐서!”

 “말이 아니라 아가씨 말하는 거야.”

 

 뒤늦게 깨달은 아이샤는 겸연쩍게 웃으며 괜찮다고 대답했다.

 시키르는 한 눈 팔면 다른 곳을 보지 못하는 아이샤가 걱정 되었는지 혀를 짰다.

 

 “시키르 체르비께서 따라오실 줄은 몰랐어요.”

 

 멋쩍어진 기색을 감추기 위해 급히 화제를 돌렸다.

 

 “중요한 일이니까. 어차피 나 아니면 알란이 따라갔어야 했어.”

 

 고개를 주억였지만 그 이후로 적당한 주제가 떠오르지 않아 쭈뼛쭈뼛 눈치를 보았다.

 

 “왜? 나보다 알란이 함께 가는 게 좋아?”

 “아, 아니에요! 그런 말은……!”

 

 불쑥 튀어나온 말에 손사래를 치려했지만 고삐를 놓으려는 기미를 보이자, 오초막이 흥분하는 바람에 진정시키는데 신경을 쏟았다.

 

 “별 수 없어. 나랑 둘이 있는 건 게세르가 싫어할 테니까.”

 

 넌더리가 난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는 모습에서 사연이 있었다는 게 다 티가 났다.

 

 “카간과 싸우신 건가요?”

 “싸우고 말고 할 게 뭐가 있어? 명령하시니 까라면 까야지.”

 

 반응을 보니 싸운 게 분명했다.

 이거 중재라도 해야 되는 건가?

 

 “무슨 일 있었나요?”

 

 무슨 일이 분명 있었겠지만, 대화의 물고를 틀기 위해선 필요한 말이었다.

 시키르는 “그게 말이야……!”라고 버럭 입을 열었지만, 웬일인지 그 이후로 말을 잇지 않았다.

 입을 다문 채로 있던 그는 “아가씨와도 관련된 일이니, 나중에 말하지…….”라고 비교적 점잖은 투로 끝맺었다.

 후미 대열 쪽으로 말머리를 돌리려던 그는 문득 떠올랐는지 “아! 그리고…….”라며 운을 뗐다.

 

 “만일 목적지에 도착한다 해도 환대받을 기대는 하지 마.”

 

 목적지라하면, 카라가나의 동쪽 '카라툰'을 의미했다.

 

 “제가……시르위족이 아니어서 그런 가요?”

 

 어렴풋이 의중을 파악하며 씁쓸하게 표정을 짓는데 예상과 다른 대답이 나왔다.

 

 “그게 문제가 아니야.”

 

 시키르는 고개를 내젓고선 말을 이었다.

 

 “아민 샤먼이 있는 카라툰 지역은 선대 카톤의 고향이야.”

 

 툭 던지듯 고백하고선 말머리를 돌리는 시키르.

 평소답지 않게 사뭇 진지한 그의 얼굴에 왠지 모르게 신경이 쓰였다.

 선대 카톤이라고 하면 선대 카간의 부인, 즉 게세르의 모친을 일컫는 말일 것이다.

 달리 말하면 카라툰이라는 지역은 현 카간의 외가가 되는 셈이다.

 카간의 친척이라면 왕실의 최측근일 거라는 것이 자연스러운 생각이었지만, 시키르의 얘기를 봐선 오히려 반목하는 사이인 듯 했다.

 분명 복잡한 왕족들 간의 사정이 개입되어 있으리라 아이샤는 추측했다.

 신경 쓸 게 한두 가지가 아니란 걸 알게 되니 머리가 아파왔다.

 게세르에게 시달릴 걱정이 없어 마르칸을 벗어나는 것에 안도 했는데 벌써부터 또 다른 파도에 직면 할 것이 예상이 되었다.

 들썩이는 안장이 익숙해져 어느 정도 주변을 둘러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기자, 뒤따르던 무카에게 슬쩍 말을 걸었다.

 

 “선대 카톤께서는 어떤 분이셨나요?”

 

 아이샤와 또래의 소년이었던 그가 알고 있는 게 많으리라 생각되진 않았지만, 그나마 마음 편히 대화 할 수 있는 상대였기에 혹여나 하는 마음이었다.

 

 “……다정하신……분이셨습니다.”

 “뵌 적이 있으신가 봐요?”

 

 고개를 끄덕이는 무카를 보니 귀가 솔깃해졌다.

 근데 ‘분이셨다’라니……과거형인 그의 말에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지금은 어디 계시나요?”

 “……승하하셨습니다……8년 전에.”

 

 게세르의 나이를 청년 정도라고 치면 상당히 이른 시기에 세상을 떠난 것이었다.

 

 “……안되셨어요.”

 

 숙연함에 손에 쥔 고삐를 내려다보았다.

 생모에 대한 기억이 없는 카야 왕녀를 모셔왔던 탓일까.

 일찍 부모를 여의었다는 사실에 마음이 동했다.

 원수에게 동정심을 품다니…….

 감정은 원하는 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것이었다.

 

 “무카도 어렸을 때였던 것 같은데, 그분에 대한 기억이 있나요?”

 

 뱉어놓고 괜한 망설임이 밀려왔다.

 너무 초전에 개인적인 것까지 알려했나…….

 

 “……염격하시면서……자상하시고……지혜로우셨습니다.”

 

 무카와도 접점이 많았었다는 새로운 사실에 아이샤는 다시 조심스러워졌다.

 

 “……어머니 같은……분이셨습니다.”

 

 여전히 높낮이가 없는 목소리였지만, 매 마른 수건에 물기를 빼듯 그가 쥐어짜낼 수 있는 최고의 찬사라는 것이 와 닿았다.

 게세르에 대한 동정을 무카로 옮길 수 있게 되어 짓궂게도 마음이 놓였다.

 

 “……병치레라도 있으셨던 건가요?”

 

 노환으로 인한 것은 아닐 터, 분명 사정이 있을 것이었다.

 무카의 가면이 지평선 너머를 향했다.

 대답을 망설이는 듯 했다.

 

 “……살해 당하셨습니다.”

 

 ‘누구한테……?’

 

 거기까지 듣고 나서 당연하게 드는 의문.

 아이샤는 곧장 묻고 싶었지만, 섣불리 파고들면 아물어가던 과거의 상처를 드러내는 꼴이 될 것 같아 그만두었다.

 

작가의 말
 

 본격적인 에피소드의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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