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연재 > 로맨스
비매너 슈트
작가 : 1427
작품등록일 : 2022.1.3
  첫회보기
 
EP.1_일년전.
작성일 : 22-01-13     조회 : 184     추천 : 0     분량 : 13087
뷰어설정열기
기본값으로 설정저장
글자체
크기
배경색
글자색
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EP.1_일년전.

 

 유난히 추웠던 것으로 기억하는 1년 전, 그날의 겨울 그쯤이었다. 나는 바람에 흔들리는 창문 소리에 잠을 깼다. 2달 전 언젠가 팔 힘 좋은 누군가가 던진 돌이 2층 안쪽 창문을 때렸는데 그때 이음새가 구부려져 바람만 불면 창문에서‘삐르륵’소리가 났다. 고치려고 했는데 촬영 때문에 미루다가 여기까지 왔다. 파주 아저씨한테 빨리 고쳐달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엘로우..,”]

 

 역시, 한 번에 반응하는 일이 없군..,

 

 [“엘로우.”]

 [“네에. 무엇을 알려드릴까요?”]

 [“오늘 일정 몇 개 있는지 알려줘. 흐흠.., 흠..,”]

 [“네! 오늘의 화보 촬영 스케줄은 7개로 확인됩니다! 상세한 내역을 원하실 경우, 저의 이름을 다시 불러주세요!”]

 [“됐어.”]

 

 목소리가 조금 잠겼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쌀쌀한 날씨에 그 강행군을 했으니, 잠깐 그런데, 어제 촬영 끝나고 몇 시에 들어왔지? 들어와서 침대에 누운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잠든 기억이 나지 않는다. 2시였나. 다리 망가진 거 아직은 안 들켰지만, 하.., 뭐든 하린이한테 또 혼나겠다.

 

 [“어?”]

 

 뭐지? 다리에 힘이 들어간다. 발가락 끝 감각도 이제 올라오는 것 같고. 잠깐? 그보다 내가 어제 휴대폰을 어디다 뒀더라. 충전은 했었나.., 안 한 것 같은데. 아.., 여기 있네. 그런데 왜 여기 있지?

 

 [“아.., 이런 역시”]

 

 지금 충전해도 30% 쯤 되려나. 뭐 하린이랑 같이 있을 것이니 문제는 없겠지.

 

 [“아! 맞다., 전화해야지...,”]

 

 아침부터 부산스럽다. 그래도 할 건 해야지. 아! 받았다. 시원한 목소리에 정신이 맑아진다. 오늘따라 유난히 더 좋다. 기분이 좋아진다. 아픈 곳이 다 나은 듯하다. 아침에 일어나 듣는 하린이의 목소리는 항상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게 해준다.

 

 [“응. 일어났어. 어디야?”]

 

 

 ※※※※

 

 

 전화통화는 별다른 이야기 없이 아주 짧게 끝났다. 빨리 일어나라는 하린의 잔소리와 지금 벨을 누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도어락 커버가 열리는 소리가 들렸고, 통화가 끊기자마자 버튼이 눌리는 소리가 들렸다. 뒤이어 현관문이 벌컥 열렸다. 그 뒤로 ‘톡톡톡’ 귀여운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그는 들려오는 모든 소리에 집중했다. 새침한 듯 무심한 발걸음이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갑작스레 들어와 놀래 킬 생각이 발걸음 소리에서 온전히 느껴지니 웃음이 났다. 오늘 촬영 그냥 다 취소하고 놀러갈까? 라는 생각이 아주 잠깐이었지만 진지하게 들었다. 발걸음 소리가 문 앞에서 멈췄다. 그, 속아주기 위해 눈을 감고 이불을 올려 얼굴을 덮었다. 짜잔, 새침하게 문이 열렸다.

 

 [“짜잔!!!”]

 

 그런데 하린, 두 팔을 벌리고 호기롭게 방으로 들어왔지만, 여전히 침대에 누워있어 격하게 자신을 안아 줄 상태가 아닌 그의 모습에 심술이 났는지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두 손은 허리에 댔다. 무척이나 귀여운 동작이었다. 안 보이지만 보였다.

 

 [“나는 일어났다고 들었는데 왜 왕자님이 안 계실까욥?”]

 

 하린의 말에 이불 속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어났습니다.”]

 [“목소리가 왜 그런가욥?”]

 [“아닙니다..,”]

 [“그럼 됐고! 빨리 일어나세욥! 격정적으로 뽀뽀하기 전에”]

 

 하린이 삐죽 내민 입술을 오물거리자 그, 대답하지 않고 이불을 돌돌돌., 돌. 말았다.

 

 [“몽충이. 그렇다면!”]

 

 하린, 기다렸다는 듯 이불 아래로 몸을 우겨놓곤 그의 몸을 타며 침대를 등반했다. 꼬물거림에 일어나는‘바스락’ 소리가 귀여웠다. 곧 그 달콤한 귀여움의 끝에서 그의 볼과 하린의 볼이 마주 닿았다. 그, 부드럽게 하린의 볼에 입을 맞췄다.

 

 [“어허? 갑지기욥?”]

 

 무방비로 입술 공격에 당한 하린, 질 수 없다는 듯 그의 얼굴에 바람을 불곤 얼굴 전체에 입술을 맞추기 시작했다. 목을 시작으로 입술, 입술 주변, 이마, 턱을 지났다. 입술이 지날 때마다 향긋한 장미향이 일어났다. 쪽쪽이를 문 아기의 옹알이 소리 같은 귀여운 소리도 났다. 그, 귀여운 소리의 간질거림에 웃음이 날 것 같았지만 참았다. 그렇게 아기의 입술 공격은 아주 조금 거세졌다가 그의 귀를 물며 끝이 났다.

 

 [“이이이뽕~”]

 

 하린, 뽀뽀 세례가 만족스러운 듯 눈썹을 으쓱이며 말했다.

 

 [“호잇!”]

 

 조그마한 하린의 손이 그의 볼 전체를 감싸 안았다. 볼이 눌린 그의 입술은‘뿌’를 말하고 있었다. 뿌뿌하기 아주 좋은 높이였다.

 

 [“우리 똥강아지 얼른 일어나야쥬?”]

 [“엉겠어요.”]

 [“엉겠어요? 우쭈쭈,”]

 

 하린, 그의 입술에 입을 살짝 맞추고 말을 이었다.

 

 [“어? 그런데 역시! 목소리에 감기 기운 포착! 설마 아니죠?”]

 [“아주 조금?”]

 [“그렇군요. 그럼 하린이의 사랑으로 치유를! 홍콩 보내줄 테다!”]

 [“보통 그런 대사는 남자 쪽이 치는 거 아닌가?”]

 [“아니지 보통 이런 건 더 급한 쪽이 치는 거지. 쿄쿄쿄”]

 

 하린,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손등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아. 맞다. 나 휴대폰 충전 못 했어.”]

 [“또? 그럼 오늘도 내 옆에 딱 붙어있어.”]

 [“엉.”]

 

 그의 어눌한 대답에 하린, 만족한 듯 두 손을 들며 말했다.

 

 [“자!! 그럼! 끝! 만세!! 일어나자!!”]

 

 천장에 닿을 듯 높이 치켜든 하린의 팔을 따라 이불이 휘날리며 침대 옆으로 쓸리듯 흘러내렸다. 하린의 목소리 톤이 올라갔다.

 

 [“음! 자! 첫 촬영 10시야. 나는 아침 준비를 할 터이니 오라버니는 저 상자를 열어서 안의 내용물을 확인하시오. 진짜 저거 옮기는데 죽을 뻔했어!”]

 

 하린이 가리키는 방향엔 중간 정도 크기의 갈색 박스가 있었는데 옮기다가 엎었는지 가장자리가 뭉개져 있었다. 대체 어떻게 들고 왔는지 모르겠지만 거의 굴리면서 온 게 분명했다.

 

 [“저게 뭐야?”]

 [“엉, 저번에 촬영했던 작품 완성본.”]

 [“아.. 이제 나올 때가 됐지., 말하지. 그럼 내가 옮기는데.”]

 [“그냥 오빠 일 할 때 잠깐 들려서 옮긴거양.”]

 [“하린이 너 힘든 것보단 내가 드는 게 나. 다음부턴 말해.”]

 [“어.., 이런 갑작스런 고백에 하린이는 끼절! 하면서 주방으로!”]

 

 방을 나가는 하린의 두 볼이 붉어져 있었다. 터지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은 그, 다리에 힘을 줘 보는데 통증이 느껴지지 않는 것에 안도했다. 촬영을 하는 대에는 지장이 없을 것 같았다. 하린이가 만든 기적이었다.

 

 [“아! 화보 보라고 그랬지.,”]

 

 다리에 몇 번 더 힘을 줘 보던 그,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나 박스로 다가갔다. 무게가 상당해 보이는 박스의 양옆 아래는 이미 터져 테이프로 대충 감겨 있었다. 테이프에서 느껴지는 갸륵함에 당장이라도 나가서 하린이를 안아주고 싶었지만 그럼 혼날 것이었다. 그러니 일단은 참고 그, 박스를 열어 안에 있던 잡지를 하나 집어 펼쳤다. 펼친 페이지엔 여성 패션에 대한 설명이 빼곡하게 적혀있었다. 설명 하단의 예시 사진 속 모델은 그가 처음 보는 동양 여자였는데 나름 괜찮았다. 분위기가 있었다. 이름이.., 최효진이었다. 신인이라고 적혀있는데 어딘지 익숙한 이름이었다.

 

 [“괜찮네.”]

 

 역시 글보다는 사진에 시선이 더 많이 가는 그였다. 하지만 바로 다음 페이지부터 이어지는 자신에 대한 내용이 담긴 부분에선 정독했다. 이번엔 특별하게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두 가지 버전으로 작업을 했다. 그중 하나가 이번 잡지에 실렸는데, 콘셉트는 중세 황제로 페이지엔 콘셉트대로 그가 금빛으로 치장된 중세 왕의 옷을 입고 서 있었다. 지금 페이지에 있는 사진은 잡지의 커버 사진이기도 했다. 고혹적인 그의 사진 옆에는 인터뷰 내용을 적은 글자들이 네모난 박스 안에 간결하게 정리되어 적혀있었다. 얼핏 보았지만 전부 그에 대한 감탄을 담은 내용이었다. 인터뷰에는 그의 데뷔 시절에 관한 내용부터 시작이었다. 마치 영웅담과도 같았다. 특히 데뷔 연도에 신인상과 이텔라 컴퍼니가 뽑는 올해의 모델상을 수상하고, 현재까지 올해의 모델상을 수상한 이력은 굵게 강조 표시가 되어있었다. 올해의 모델상 시상은 전설적인 모델인 이텔라 로즈가 설립한 이텔라 컴퍼니에서 매년 개최하는 이벤트로 상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부터 이미 모델계의 노벨상으로 불릴 정도의 권위를 갖고 시작을 했다. 그래서 처음 수상자로 그가 선정되었던 당시엔 그가 이텔라 로즈의 최초의 동양인 제자이기에 형평성 논란이 일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가 받지 않는다면 그것이 곧 논란이 될 것이었다.

 

 [“오빠! 아침 먹어!!”]

 [“어잇. 깜짝이야.”]

 

 그, 하린의 호탕한 부름에 순간 몸을 움찔거렸다. 자자.., 잘못한 건 없었다.

 

 [“어, 나갈게요.”]

 

 그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곤 잡지를 침대에 내려놓고 곧바로 운동복으로 갈아입었다. 갈아입는 속도가 매우 빨랐다. 방문을 여는 건 더 빨랐다. 문이 열리자 문과 문 사이를 두고 맛있는 냄새가 그의 코를 때렸다. 식탁에는 조촐하지만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이 차려져 있었다. 모두 그가 좋아하는 반찬들과 미역국이었다. 그가 식탁 의자에 앉자 하린, 그의 옆으로 다가와 앞치마를 풀며 입술을 쭉 내밀었다.

 

 [“뽀뽀?”]

 [“바보.., 그런 건 말하지 말고 하란 말이야.”]

 

 하린,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고,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생각을 해보니 하린의 관리 하에 들어 온 뒤로 아침을 거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하린의 요리 솜씨 또한 수준급이라 매번 아침이 행복 그 자체였다. 제일 큰 건, 하린은 밥을 먹을 땐 일에 관한 이야기는 절대 하지 않았다. 그는 이것 때문에 누군가와 밥을 먹는 것에 극도의 예민함과 거부감을 드러냈었다. 지금은 하린이 덕분에 많이 고쳐졌지만 정말 이 문제로 고생을 했던 그였다.

 

 [“음.., 이번 주는 어디갈까?”]

 [“음.., 하린이가 정한 곳?”]

 [“바붕. 그럼..., 청계천?”]

 [“좋지.”]

 

 밥을 먹으며 하는 대화 주제 대부분 다음 데이트 장소를 정하는 것과 음식과 소소한 일상 대화였다. 장소는 보통 하린이가 가고 싶은 곳으로 정해졌다. 그런데 오늘은 조금 특별한 주제가 들어왔다.

 

 [“짜잔!”]

 

 하린이 장난스럽게 주위를 둘러보곤 가방에서 조그만 유리병을 꺼내 보이며 자랑했다. 유리병 안에는 옅은 상아색의 가루가 들어있었다.

 

 [“오! 드디어 완성 한 거야?”]

 

 말하는 그의 눈이 커졌다.

 

 [“웅!! 드디어 완성했지 판매 승인받고 다음 달부터 판매 시작하려고!! 지금도 이거 바른 거야! 절대 안 지워져. 물로만 지울 수 있어. 예쁘지?”]

 [“예쁜데? 지나칠 정도로.”]

 [“치.., 또 그런다.., 그래도 오빠가 그렇게 말해주면 좋앙! 이제 오빠한테 막 안 길 수 있어.”]

 [“나도 좋아요.”]

 

 그의 미소에 하린,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아~ 배부르다. 오빠, 나 먼저 나갈 테니까. 그릇들 물에만 담가놓고 준비 끝나면 지하주차장으로 내려와. 또 설거지하고 내려오느라 늦게 내려오면 맴매 맞을 거야. 나! 손에 물을 묻힐 거야!!”]

 

 그, 밥이 반 이상 남아있는 하린의 밥그릇을 보곤 대답했다. 덧붙이진 않았다.

 

 [“응. 금방 나갈게.”]

 [“옹! 그 의상 2번 때 3번을 입자, 4번에서 6번은 차에 있어.”]

 [“알겠습니다.”]

 [“아! 맞다. 오빠 이사 때문에라도 새집에다가 거실 가구랑 2층이랑 3층 옷은 좀 넣어놔야 할 것 같은데. 계속 미뤄지네. 이 집도 크지만 가는 집은 더 넓으니까 미루면 문제 생길 것 같웅.”]

 [“음.., 그럼 어차피 시간은 많이 남아있으니까. 같이 정리하자 내일모레, 오후 쯤?”]

 [“알겠옹! 새로 이사 가는 곳은 저얼대로!! 들키면 안 돼! 지금 밖에서 소리 지르는 사람들처럼 거기도 시끄러워지면 나 울 거야 정말.”]

 [“그러니까 하린이랑 몰래 가야지.”]

 [“응.., 그래야징. 오빠를 차에 묶어서 가야징. 그런데 이사 가면 오빠랑 같이 살 수 있는 거 맞지?”]

 [“그럼! 혁수 형한테는 내가 말할게.”]

 [“오호호호.., 호호호.., 아! 그런데 집주인 창문 망가진 거 알옹?”]

 

 그, 하린의 말에 살짝 흠칫했다. 창문에 대해 하린은 알고 있었다. 가뜩이나 밖에 있는 사람들 때문에 민감한데 굳이 말했다가 걱정시킬까 말하지 않았는데 어디서 들은 것이었다.

 

 [“어? 어?.. 어어.., 안 그래도 파주 아저씨 불러서 고치려고.”]

 [“알겠옹. 지금 내가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하군요! 혁수한테 들었지비! 그럼! 준비 다 하면 내려와용!”]

 [“응.”]

 

 범인은 혁수였다.

 

 [“그러믄, 나는 이제 나가야지.”]

 

 그런데 그의 볼에 입을 맞추고 현관문으로 걸어가던 하린, 갑자기 현관문 옆에 있는 네모난 기둥에 한 쪽 다리를 기대곤 치마 깃을 허벅지까지 올리며 매혹적인 표정을 지었다. 그, 무방비 상태로 당해버렸다. 눈썹까지 까딱이는 하린의 표정에 굴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기.., 이따봐용.., 잇힝.”]

 

 결정타였다.

 

 그래도 아침부터 휘몰아친 하린의 공격에 기분 좋게 하루를 시작한 그는 상상도 하지 못할 집중력으로 빠르게 오전 화보 촬영을 마쳤고, 지금은 서울 근교의 어느 카페에서 갑자기 잡혀버린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하린은 미리 섭외되지 않은 인터뷰였기에 격하게 인터뷰 요청을 거절했지만 요청한 곳이 대학교 동아리인 것을 안 그가 허락하자 20분 내로 끝마칠 것을 조건으로 인터뷰를 허락했다. 하린은 연신 시계를 보며 뚱한 표정으로 인터뷰를 하는 여자의 뒤통수를 바라보다가 약속한 시간에 정확하게 인터뷰가 끝나자 그때 서야 표정을 풀었다. 하지만 결국, 다음 촬영장으로 이동하는 차 안에서 하린의 분노가 터졌다. 작음 몸집에서 나오는 살기가 대단했다.

 

 [“야!! 아니!! 인터뷰를 잡으면 어떻게!! 촬영도 아직 안 끝났는데!!! 이 바보야!! 오빠 몸도 안 좋다고!! 그리고 이 멍청아!!!! 네가 스케줄 잘못 알려줘서 너 때문에!! 지금 의상실 가잖아!!!”]

 

 하린의 윽박에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휴대폰 너머의 남자는 목소리를 떨고 있었다. 분명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것 같은데, 하린의 윽박에 계속 타이밍을 놓치고 있는 것도 같았다.

 

 [“그리고? 뭐? 자기들 시간에 맞춰? 웃기지 말라 그래요. 끊어 바빠! 나 운전 중이야 사고 낼 거야. 또 전화하면.”]

 

 하린의 말에 그의 몸이 살짝 움츠러들었다. 다행히 전화는 다시 오지 않았다.

 

 [“말이야. 방구야. 정말., 오빠 힘든데.”]

 

 한참을 성내던 하린은 갑자기 소리를 지르더니 입술을 쭉 내밀곤 이상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뿌뿌뿌뿌뿌뿌뿌뿌뿌뿌뿌!!!!”]

 

 그 소리에 그, 신경을 안 쓰는 척, 하다가 소리가 점점 커지자 결국 터져버린 웃음에 급하게 손으로 입을 막곤 눈을 감았다.

 

 [“웃지마라.., 혼다. 아니 혼나.”]

 

 그, 하린의 경고에 곧바로 웃음을 멈추고 대답했다.

 

 [“혼다?”]

 [“뭐라고?”]

 

 하린의 눈에서 불을 보았다.

 

 [“아.., 죄송합니다. 미안., 그보다 형이 인터뷰 잡았대?”]

 [“응. 말이야 방구야.”]

 [“그래도 하린이 덕분에 접었네.”]

 [“오빠 때문에 참은 거야. 정말.., 그러니까 이제 눈 떠. 안 들이박을 거야.”]

 

 하린의 말에 천천히 눈을 뜬 그, 가만히 하린을 바라보다가 조금 붉어진 하린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흥!”]

 [“귀여워,.,”]

 [“흥!!! 뿡뿌!”]

 

 그, 하린의 볼을 쓰다듬었다.

 

 [“소중해..,”]

 [“허지마라..,”]

 [“어우 귀여워.”]

 

 하린의 눈에서 일던 불이 약해졌다. 볼은 조금 더 붉어졌다.

 

 [“정말? 진짜? 진짜루?”]

 [“그러니까. 이제 하린이 그만 화냈으면 좋겠다.”]

 [“흥, 알겠또..,”]

 

 그, 환하게 웃으며 그녀의 볼에 입을 맞췄다. 이 세상의 모든 화가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처음부터 화가 났었던가?

 

 [“아잉 사고나.”]

 [“미안. 다 온 거 아닌가?”]

 [“응! 저기 앞에 있는 코너 만 돌면 돼. 오빠는 여기 처음이지?”]

 [“어..., 아, 처음이다.”]

 [“뭐양.”]

 

 하린, 애교 섞인 투정을 하며 오른쪽으로 핸들을 돌렸다. 조금 좁은 길이었지만 하린은 능숙하게 운전하며 안쪽으로 차를 몰았다. 차가 길 안으로 조금 더 들어오자 왼쪽에 의상실 간판이 나타났다.

 

 [“옷가지고 오는 거, 도와줄게. 많잖아?”]

 [“아니. 아니! 아니!!”]

 

 그의 말에 하린,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의상실 앞길에 차를 세우곤 박력 있게 사이드브레이크를 잠갔다. 하린의 박력에 그, 대답의 타이밍을 놓쳤다.

 

 [“잠시만 기다리고 있어용. 쟈귀..,”]

 

 하린, 그에게 새침하게 윙크를 하곤 차에서 내리자마자 의상실로 뛰어 들어갔다. 총총거리는 걸음걸이였지만 뒤이어 날리는 바람은 마치 삼국지의 관우와 같은 기백이었다. 그 기백으로 의상실로 들어와 테이블 위에 있던 수십 벌의 의상을 모두 체크하고 등에 얹는데 8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옷이 하린을 업은 것도 같았다. 다음 촬영까진 분명 여유가 있었지만 하린의 발걸음은 빨랐다. 그것은 조금이라도 빨리 준비해 남은 시간 동안 그가 쉬었으면 하는 마음 때문일 것이었다. 그 마음을 그가 모를 리 없었기에 하린이 나오는 시간에 맞춰 카페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사와 건넸다. 하린, 호탕하게 컵을 집어 한 번에 들이키곤 숨을 돌렸다.

 

 [“내가 운전할까?”]

 

 아무렇지 않은 듯 했지만 가지고 온 옷들을 트렁크 안에 정리하는 하린의 이마에 땀이 흠뻑 맺혀있었다. 앞 머리카락은 땀에 젖어 이마에 딱 붙어있었다.

 

 [“아니! 가자!! 이 시간대로 가면 오빠 50분은 쉴 수 있어!”]

 [“어? 어. 어.”]

 

 그, 홀리듯 조수석에 앉았다. 그런데 촬영장으로 가는 길이 이상하리만큼 막히자 하린의 표정에 점점 초조함이 들어찼다. 30분쯤 지나자 앞쪽에 멈추어 서 있는 두 대의 차에서 연기가 나는 것이 보였다. 아무래도 사고가 난 것 같았다. 눈가에 성이 찬 하린은 전방만을 보고 있었다. 그는 이미 늦은 것이기에 천천히 가자고 했지만 스케줄이 머릿속에 입력된 하린에겐 들리지 않았다. 결국, 촬영장에 1시간이나 늦게 도착했다. 하린은 분함에 도착하자 눈물을 터뜨렸다. 하린의 마음을 잘 알기에 그, 아무 말 없이 하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린, 운전대에 머리를 박고 울음 반, 공기 반인 목소리로 말했다.

 

 [“가아.., 빨리. 늦었잖우..,”]

 [“흠.., 오늘 촬영 접고 하린이랑 놀까?”]

 [“됐어잉..., 빨리 가아아..,”]

 

 하린, 그의 옆구리를 찔렀다.

 

 [“금방 끝낼 테니, 끝나고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엉.., 빨리가잉..,”]

 

 그, 말을 시키면 더 울 것을 알기에 하린의 볼에 입을 맞추고 차에서 내렸다. 차 앞에서 장비를 들고 대기하고 있던 스태프들은 그가 차에서 내리자 모두 달라붙어 케어를 시작했다. 사방에서 고성과 셀 수 없는 많은 소리가 터져 나왔다. 늦게 시작한 만큼 촬영장 분위기는 상당히 냉랭했고 부산스러웠다. 웃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차츰 사람들의 입가에 미소가 일어났다.사람들은 모니터에 찍혀나오는 결과물을 보며 탄성을 질렀다. 어느새 옆 스튜디오 사람들까지 들어와 구경하고 있었다. 그런데 더할 나위 없이 좋게 흘러가던 작업이 어딘가에서 들려 온‘대표님’이라는 단어에 갑자기 멈췄다. 스태프들이 한 방향으로 일제히 인사를 했다. 포즈를 잡던 그의 표정이 차갑게 변했다. 아주 미세한 표정 변화였지만 사진작가는 안절부절못하며 카메라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어.., 김작가.”]

 

 곧 무대 앞으로 고급스러운 정장을 갖춰 입은 중년 남자가 나타났다. 그, 그대로 무대에 있던 의자에 앉곤 눈을 감았다. 사진작가는 그에게 90도로 허리를 숙여 사과 인사를 하곤 이어서 중년 남자에게 머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대표님, 오셨습니까! 1시간 뒤에 오신다고 하셔서 미처 자리 준비를 못 했네요. 혼자 오셨습니까?”]

 [“네. 혼자 왔습니다. 그리고 와서 봐야지요. 어떻게 딴 촬영인데.”]

 [“아. 네.., 그럼 이쪽으로 오시죠,”]

 [“아.. 네. 저 의자인가요?”]

 [“네. 맞습니다.”]

 

 중년 남자, 그를 잠깐 바라보고는 사진작가가 안내하는 의자로 가 앉았다. 촬영장에서 흔히 보는 플라스틱제 의자가 아닌 소파 같은 고급스러운 의자였다. 촬영장과 아주 어울리지 않는 의자였지만 중년 남자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대표님. 양해의 말씀으로 지금 모델분의 집중도가 제일 예민한 타임이라 직접적인 인사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사진작가의 말에 중년 남자, 놀라며 손을 흔들었다.

 

 [“아! 아. 그럼 안 되지요. 계속하세요. 저 신경 쓰지 마시고.”]

 [“네. 감사합니다. 그럼.., ”]

 

 사진작가, 중년 남자에게 공손하게 인사를 한 뒤, 소리쳤다.

 

 [“자! 촬영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조금 늦었으니 빠르게 가겠습니다!!”]

 

 사진작가의 말에 따라 곧 촬영이 다시 시작되고 시간이 지나며 촬영장 분위기는 다시금 안정화됐다. 중년 남자는 입을 한 번 튕기고는 조용히 촬영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중년 남자의 시선이 그에게 꽂혔다. 시선은 움직이지 않았다. 촬영 간, 터지는 플래시에도 눈을 깜빡이지 않았다. 그 중압감에 커피를 가져온 스태프는 눈치를 보다가 테이블에 아주 조용히 커피잔을 내려놓곤 뒷걸음으로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바로 그때, 그도 중년 남자를 바라보았다. 기억을 해냈다. 저 남자가 누군지 말이다. 그래서 촬영장 분위기를 망치고 자신을 평가하고 있는 저 괘씸한 남자에게 장난을 좀 쳐볼까 생각했다. 그는 잠시 촬영을 중단하고 메인 콘셉트를 즉석에서 변경했다. 그의 생각을 사진작가도 이해를 한 듯 사진기를 삼각대에서 풀어 두 손에 움켜쥐었다. 고정된 앵글이 깨지고 그 안으로 생동감이 폭발하자 중년 남자의 입가에 미소가 드리워졌다. 그의 도전을 받아드렸다. 살짝 찔러봤을 뿐인데 진지하게 받아드린 그의 선택이 재밌는 듯 중년 남자는 그와 이어진 지금의 선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였다. 숨을 쉬기 어렵다는 느낌을 받은 중년 남자가 갑자기 넥타이를 풀었다. 그리고 그 느낌의 정점에서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을 때 자신이 졌다는 것을 인정했다. 한숨 소리에서 약간의 분노가 느껴졌지만, 분노보단 놀라움이 훨씬 더 컸다. 직접 보기 전까진 믿지 않았었다. 그러나 완벽한 작품을 눈앞에서 직접 보았다. 믿을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봄의 패션을 관장하는 신에 대한 완전한 경외감이었다.

 

 [“흠흠..., 하.., 저기, 나는 이만 가도록 하지.”]

 

 중년 남자의 말에 옆에 서 있던 직원이 놀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김작가에게는 고맙다고 전하고, 방송 출연에 대한 것 좀 꼭 좀.., 제발.., 꼭 좀.., 전해주게.”]

 [“네 알겠습니다.”]

 

 중년 남자는 다시금 크게 한숨을 내쉬고 자리에서 일어나 뒤에 있던 문으로 조용히 나갔다. 그는 밖으로 나가는 남자를 본 뒤 바로 촬영을 마무리했다. 그의 이마에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오랜만에 받아보는 도발에 무리해서인지 시원함도 있었지만 역시 이 이상은 다리가 못 버틸 것 같았다. 그렇게 촬영이 끝나고 촬영장이 정리되자 사진작가가 그의 대기실로 들어왔다. 하린, 날카로운 표정으로 사진작가를 경계했다.

 

 [“아, 작가님 오늘 고생하셨습니다.”]

 [“아닙니다. 제가 더 오히려 감사합니다.”]

 [“그런데 혹시 오늘 첫 촬영이셨나요?”]

 [“네, 맞습니다. 이번에 데뷔한 김재원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김재원?”]

 

 하린, 자신도 모르게 나온 말에 놀라며 고개를 숙였다.

 

 [“아! 죄송합니다.”]

 

 재원, 하린 보다 더 놀라며 손사래를 쳤다.

 

 [“아! 아닙니다. 아.., 그보다 혹시.., 최대표님께서 명함과 함께 방송 출연에 대해 말씀을 하셔서 그 내용을 전해드리기 위해 왔습니다.”]

 [“아.. 네, 그런데 죄송하지만 그런 내용은 회사를 통해 전달해주셨으면 합니다.”]

 [“아!, 정말 죄송합니다. 그럼 이만.., 죄송했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재원이 나가고 뒤에서 엄청난 궁금궁금 구름이 피어올랐음을 느낀 그, 뒤 돌아 하린을 바라보았다. 하린은 재원의 이름을 곱씹으며 그에게 다가왔다.

 

 [“이재.., 아.., 김재원.., 어디서 많이 들어봤는데..,”]

 [“응…. 그 사람이잖아. 엔써니 찍어 준 남자 그, 신인 작가.”]

 [“아!! 맞아! 기억났다. 잡지에서 봤다. 아깐 갑자기 튀어나와서 놀랐으..,”]

 

 그, 하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내가 말하는 걸 바로 이해를 하더라고, 앞으로 촬영 편해질 것 같아.”]

 [“응! 그런데..,”]

 

 그, 하린의 표정에 화가 일어나자 고개를 갸웃했다.

 

 [“그 아저씨가 최대표야? 누군데 촬영장에 막 들어와서 끊어?”]

 

 그, 하린의 물음에 바로 대답했다.

 

 [“맞아. DN사장이야. 나도 처음 봤을 때, 긴가민가했는데 이름이 최진강? 이었나.., 아마 이 스튜디오도 본인 소유일 거고. 확실한 건 아닌데, 과거엔 패션 쪽에서 일하셔서 선생님도 알고 있을 거야.”]

 [“칫.., 그래? 별꼴이야.”]

 [“음.., 왜 별꼴일까?”]

 

 그, 뾰로통해진 하린을 부드럽게 안으며 물었다.

 

 [“흥.. 몰라. 그냥 별꼴이야.”]

 

 가까이서 보니 어디서 울다 온 듯 볼은 조금 붉어져 있었고 눈도 조금 충혈되어 있었다. 그런데 어떤 때 보다 귀여웠다.

 

 [“울었어?”]

 

 그의 물음에 하린, 그의 옆구리를 주먹으로 살짝 때렸다.

 

 [“아니거든. 바보야.”]

 [“나는 괜찮으니까. 앞으로는 천천히 움직이자.”]

 

 그, 하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위로했다.

 

 [“알겠엉. 그냥 분해서 빨리했는데 망할 사고 때문에”]

 [“어허.. 말 예쁘게.”]

 [“아잉., 알겠옹. 꺄!”]

 

 그, 말을 하던 하린을 부드럽게 안아 올린 뒤 자연스럽게 자신의 무릎에 앉혔다.

 

 [“예쁘다.”]

 [“치.., 밖에 사람들 있어.”]

 [“문 잠그면 되지.”]

 

 그의 말에 하린, 말없이 그의 품속으로 몸을 파묻었다. 그러다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뭐라고 말을 하더니 이내 색색이는 옅은 호흡을 불었다. 오늘 아침 못해도 새벽 4시쯤에 일어났을 것이었다. 그 시간에 일어나 온종일 고생을 했으니 피곤할 만도 했다. 그, 코트를 살짝 들쳤다. 잠에 빠진 하린의 모습이 무척이나 귀여웠다. 그, 하린이 깨지 않게 최대한 조심스럽게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는 곧바로 연결됐다.

 

 [“형. 오늘 여기서 촬영 끝내. 하린이가 피곤해한다. 그건 상관없고, 아직 여유 있잖아. 그냥 하린이 감기 기운 있으니까. 일단 미뤄. 어 준호 보내줘. 아니야, 그냥 좀 다리 쪽에 왔다. 크게 아픈 건 아니야. 어 알겠어. 끊어. 아.., 나 다리 아픈 거 하린이한테 절대 비밀이다.”]

 

 전화가 끊어지자 그, 옆에 있던 담요를 집어 하린의 몸을 덮었다. 생각을 해보니 하린이가 이렇게 가벼웠나 싶었다. 일도 많고 힘을 써야 하는 일이 많아, 이래서 처음에 같이 일하는 걸 반대했던 것이었는데, 이제는 하린이가 없으면 일이 되지 않았다. 욕심일 수도 있겠지만 끝까지 함께 일하고 싶은 그였다. 사실 본인만 잘하면 된다는 생각도 잠깐이지만 했다. 통증이 사라져 다시금 오른쪽 다리에 힘을 줘보았다. 다행히 통증은 많이 없어졌지만 역시 힘이 잘 안 들어갔다. 조금만 더 촬영이 길어졌으면 들킬 뻔했다. 들켰으면 오늘 무슨 일이 일어났을 것이었다. 사실 그게 제일 무서웠다.

 

 [“하.., 일단.., 지금은 이렇게 있자.”]

 

 그, 살포시 하린의 이마에 입술을 맞추고 하린을 살짝 더 자신의 쪽으로 안았다. 그래, 맞다. 뭐든 지금은 일단 이대로 있자. 그러면 되었다.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해도 늦지 않을 것이었다.

 
 

맨위로맨아래로
NO 제목 날짜 조회 추천
2 EP.1_일년전. 1/13 185 0
1 EP.0_Memory_시간이 멈춰버린 날 1/3 293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