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어서, 배부른 소리 한다. 내가 30년만 젊었어도! 어떻게든 따라다니는데. 아까워, 아깝다.”
솜털이 뽀송뽀송한 댕댕이를 남자라고 생각하기도 싫었다. 지국장마저 불편한 관계가 되어버린다면. 그때는 정말로, 내가 갈 곳도 없다.
두려움에 갑자기 술이 확 깼다.
“사장님, 전국으로 체인점 내시면 좋을 것 같은데. 아직도, 프랜차이즈는 싫으세요? 조건은 서로의 관점 차이를 약간만 양보하면 윈(win)-윈(win) 할 수 있어요. 기회가 너무 아까워서 그래요.”
“아깝기. 뭐가 아까워. 이 정도 벌었으면, 성공했지. 이 이상을 바라면, 도둑놈 심보다.”
“사장님~ 하신 대로, 그대로만 해주면 됩니다. 대박 나요. 사장님, 제가 미덥지 못하면, 담당자를 바꿔드릴 수 있어요.”
소주를 원샤한 삼겹살 사장이 냉담하게 말했다.
“믿지 못하지. 내가.”
“죄송해요. 믿음을 못 드려서.”
말은 죄송하다고 내뱉지만, 섭섭한 마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입안이 껄끄러웠다.
“내 말은, 홍 대리는 믿어도! 그놈의 회사를 못 믿겠다고. 덥석 계약했다가, 홍대가 그만두면, 나는 닭 쫓던 개가 된다고. 그래서 싫어.”
“이유 같지 않은 이유네요.”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하다고. 농담처럼 되받아쳤지만, 올라간 내 입꼬리를 잡아 내릴 수 없었다.
죽어라 일해도, 회사는 죽으라고, 인정해 주지 않는데. 오히려 회사 밖에서 인정받는 꼴이 서글펐다.
***
“어휴, 내 머리야! 내 속이야~! 소주는 역시 내 체질은 아니야.”
시끄럽게 울리는 알람 소리에, 비몽사몽으로 겨우 실눈을 떴다.
숙취에 갈증 나서 벌떡 일어날 것 같았지만. 몸과 마음이 따로국밥처럼, 몸은 미동조차 할 수 없었다. 궁여지책으로 마른침을 모아 삼켰다.
“누가 물 좀 갖다 줘~ 댕댕아~어디 있냐? 누나가 목이 마른다. 물 좀 …….”
적막감에 나 홀로임을 읊조리다가, 이내 눈을 감았다.
잠결에 들리는 문소리에 놀라, 실눈을 살짝 떴다.
‘도둑인가? 어떻게? 술김에 문이랑 문은 다 열고 다닌 거야! 미쳤어. 야구 방망이가 어디 있지?’
물먹은 솜처럼 무거워진 몸을 간신히 일으킨 나는 옷걸이 봉을 꽉 잡고 떨고 있었다.
벌컥 열리는 문소리에 옷걸이 봉을 휘두르다가 내 발에 내가 걸려 철퍼덕 바닥에 엎어졌다.
“으~악.”
생수병을 들고 있던 지국장이 한심한 눈초리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쯧쯧쯧. 술을 얼마나 마셨으며, 아직도 바닥이 용암처럼 솟구쳐 보이지! 술 냄새가 쩐다. 쩔어! 이게, 여자 방에서 나는 냄새야? 노숙자 냄새지.”
헛것이라도 본건 마냥 내 두 눈을 비볐다.
“언제 왔냐?”
한숨을 내쉰 지국장이 손을 내밀었다.
“방바닥에 쓰러져 있는 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불행이라고 해야 하나? 일어나. 빨리. 또 발목 접질렸어?”
방바닥에 엎드려 있는 내가 걱정스러운지, 한쪽 무릎을 꿇은 지국장의 핀잔이 누그렸다.
“에~이씨.”
생쑈한 내가 민망하고, 제멋대로 나갔다가, 지 마음대로 들어온 지국장이 야속하고 얄미웠다.
그 와중에서도 그 녀석을 올려다보며, 안도감을 느끼는 내가 제일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에 자꾸만 짜증이 밀려왔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야. 일어나. 발목 좀 보자.”
내 발목을 살펴보려는 지국장을 밀쳐냈다.
“냅 둬!”
화를 삭이듯 지국장은 어금니를 꽉 깨물고, 엄지손가락과 검지손가락으로 나의 양 볼을 꾹 짓눌렀다.
그 덕에 붕어처럼 벌어진 내 입술에 지국장이 생수를 들이부었다.
“뭐가 그렇게 짜증이 났는데. 사랑스러운 누나야~ 그리고 어떻게 들어왔어라고 물어야지! 겁도 없이 문 안 잠그고! 잠이 와. 누나.”
“~읍. 그…만.”
“안 돼. 물 마시고, 술이나 깨. 더 마셔. 어구. 착하다. 착해. 우리 누나. 쭉~쭉 들이켜.”
입안에 밀려오는 생수에 정신없이 받아먹다가 울컥한 내가 지국장의 얼굴에 생수의 단비를 뿌려졌다.
“그만해! 그만하라고. 누굴 물먹는 하마로 아나. 가뜩이나 머리도 아픈데. 저리 가. 나 잘 거야. 빨리 네 방으로 가버려.”
내 손을 끌어다가 자신의 얼굴을 닦던 지국장은 한쪽 입술을 깨물고, 복화술을 선보였다.
“고맙네. 얼굴에 미스트도 뿌려주고. 역시 사랑스러운 누나밖에 없다. 이만하면, 정신 차렸을 것 같은데! 거실로 나오시지. 우리 사랑스러운 누나, 속~좀 풀게.”
“귀찮아. 다 필요 없어. 좀 더 자다가 출근하게 그냥 냅둬.”
무섭게 째려보는 지국장의 눈길을 피해, 포근한 내 이불속으로 도망쳤다.
“귀하신 우리 누나가 이리도, 몸져누웠는데. 배달의 민족답게! 이 몸이 당연히, 모시고 나가드리죠.”
이불을 둘둘 말린 나는 애벌레처럼 보쌈한 지국장이 거실로 나갔다.
“그냥 내버려 둬. 먹고 싶으면, 너 혼자 먹어. 속이 울렁거린다고. 확~물어버리기 전에, 빨리 내려줘. ”
둘러 업힌 지국장의 어깨에서 발버둥 치며, 그의 목덜미를 물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악! 진짜, 왜 물어”
“그러니까, 내려주라고 해잖아.”
“아~씨. 이젠 하다 하다가, 개로 둔갑술을 부리시네. 우리 사랑스러운 누나가! 어휴~진짜. 그놈의 술! 작작 드시지요.”
“시끄러워. 속도 울렁거리고. 내려줘. 골이 흔들려, 머리가 아프다고. 빨리.”
징징거리는 나를 기어이 식탁에 앉힌 지국장이 북엇국 한 숟가락을 떠먹여 줬다.
“젊게 살려고. 애처럼 투정 부리고. 사랑스러운 우리 누나~! 동안 미모 누나야. 아~해보세요. 이 오빠가 먹여줄게요. 아~”
“저리 치워. 내가 애야! 안 먹어. 안 먹는다고! 머리가 울린다고. 냅 둬. 제발~”
“그러게, 조류도 아니고. 소주 먹으면 숙취로 개고생하는 거, 뻔히 알면서. 먹고 싶어! 이거 다~ 먹기 전에, 한 발자국도 움직일 생각하지 마. 아~해봐. ”
“싫어! 내가 하마도 아닌데, 자꾸 입 벌리네. 귀찮아. 나 잔다. 깨우지 마.”
지국장의 끈질긴 실랑이에 피곤해진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일어서는 내 손을 붙잡은 지국장은 웃음기 가득한 눈매로 협박했다.
“사랑스러운 누나의 입을 그렇게 다물면, 탐스러운 입술이 열릴 때까지 뽀뽀한다. 나야, 좋지만. 어떻게 할래?”
“뭐!… 하다고. 미쳤어. 미쳤나 봐! 어딜… 남매끼리! 네가 술 취했어? 아침부터, 시답지 않은 헛소리나 하고. 머리라도 다쳤어?”
흠칫 놀란 나는 뒷걸음질 치며, 손바닥으로 입술을 틀어막았다.
탄탄한 팔 근육을 자랑하듯, 지국장은 내 손을 잡아당겼다. 요염한 눈빛으로 응수했다.
“친남매가 아니라서, 이러는 거잖아. 그런 깜찍한 이유 같지 않은 이유로 우기는 누나라서, 사랑스럽지만.”
“으~ 윽”
오글거림에 헛구역질하는 내 앞에서 지국장은 자신의 입술을 핥으며 도발했다.
“참고로, 누나의 입술이 온종일 앙~다물었으면 좋겠는데. 실컷 뽀뽀도 하다가 누나의 잇새를 혀로 핥다가 진득하게 엉키고 설켜서, 가쁜 숨을 내뱉고. 누나의 아랫입술을 깨물어보고 싶고. 또,”
“그만! 하지마! 그 입 좀 제발~”
말만 들어도 내 입안이 얼얼하고 혀가 화끈거렸다. 불타오르는 내 얼굴을 숨기려고, 타조처럼 식탁 위로 엎드렸다.
귀여운 애 달래듯, 지국장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면서도 녹진한 도발은 멈출 줄 몰랐다.
“입술이 싫으면, 누나의 하얀 목덜미에 내 입술로 붉은 꽃들을 한 아름 안겨줄까? 그것도 싫으면, 누나의 앙증맞은 입으로 내 갈비뼈마다 뽀뽀해주고, 깨물어줘도 좋은데.”
“~읍…….”
“선택해. 일어나서 북엇국 드시고 출근하시던가. 아니면, 내 입술을 받아들이던가. 응~누나.”
“먹는다고. 먹어!”
피식 웃던 지국장이 억지로 넣어준 북엇국을 삼키면서도 식탁만 내려봤다.
“눈두덩이가 띵띵 부어서 눈도 못 뜨는데, 어쩜. 이리도 누나가 사랑스러울까! 어구, 잘도 받아먹는다. 잘 했어용~ 박수.”
“…….”
낮 뜨겁고 오글거리는 지국장의 말투가 당황스럽지만. 발정 난 댕댕이를 자극할까 싶어, 말을 삼켰다.
‘빨리 먹고 출근하자. 그게 내 살길이다.’
오빠 놀이도 질렸는지, 지국장은 내가 그토록 원하던 침대 속으로 나를 얌전히 옮겨줬다.
“씻고, 출근해. 사랑스러운 누나 ~쪽.”
손발이 오글거리는 손 키스를 날린 자신도 웃기지. 지국장은 실실거리며 내 방에서 나갔다.
***
보고서에 오타를 점거하고 손목시계를 봤다.
‘박 부장이 아직 안 왔네. 아직도 본부장한테 깨지고 있나? 11시까지 올리라고 했는데.’
그때, 김 과장과 박 부장이 씩씩거리며 사무실에 돌아왔다.
“이제 좀 회사 생활 편하게 한다, 싶었는데! 이 회사가 나한테, 이럴 수는 없지. 누구 덕에 이 부장이 군말 없이 나갔는데! 나한테 이럴 수 없지.”
김 과장은 미친X처럼 널뛰며 발광하는 박 부장을 보며 안절부절못했다.
이 부장이 누구 덕에 군말 없이 나갔는데!
“부장님, 부장님이 참으세요. 부장님, 혈압만 올라가요.”
“재주는 내가 부리고. 돈은 딴 놈이 챙기고. 듣도 보도 못한 어린놈이 승진하고. 누굴 쓸개도 없는 얼빠진 인간으로 아나!”
분을 못 이긴 박 부장은 의자가 들썩거리게 앉았다.
“부장님, 좀 조용히…송 이사 귀에 들어가면 큰일 나요.”
“말 잘했다. 송 이사도 나한테 이러면 안 되지. 아직 내겐 장부가 있는데!”
울분을 터뜨리는 박 부장의 입을 손바닥으로 틀어막은 김 과장이 주위를 살피며 귓속말했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고. 부장님, 제발요. 이사님 이야기는! 네. 부장님.”
숨이 막힌 듯 박 부장은 신경질적으로 김 과장을 밀쳐냈다.
“더럽게. 안 치워. 젠장. 돌아가는 꼬락서니 보니까. 까닥하다간, 우리도 팽당하게 생겼어. 무슨 말인지 알아봐. 아무리 생각도 찜찜해.”
김 과장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마른침을 삼키고 되물었다
“설마요?… 아니. 우리가 잘못되면, 위도 자유로울 수 없는데. 왜 이사… 님이 그렇게까지…….”
김 과장과 박 부장의 쑥덕거림이 심상치 않아 뒤로 보고를 미룰까도 생각해봤지만. 매는 미리 맞는 편이 낫다는 생각으로 박 부장 자리로 걸어갔다.
박 부장과 이야기를 나누던 김 과장이 내 인기척에 소스라치게 놀라 자빠졌다.
“엄마야! 뭐야 홍 대리.”
혼비백산한 박 부장은 사무실이 울릴 정도로 고함을 쳤다.
“근무시간에, 누가 마음대로 움직여! 놀러 왔어. 이따위로 일하고, 월급 받고 싶어. 홍 대리. 입 있으면, 말을 해 봐.”
‘아 진짜, 압력솥에 문어 박 부장을 넣어 삶아버리고 싶다.’
인내심을 최대한 발휘한 나는 입꼬리를 올리고, 박 부장이 보낸 카톡을 또박또박 읽어 내려갔다.
“홍 대리! 오늘, 무슨 일이 있어도. 오전 11시까지 결재 서류를 내 책상에 올려놔! 놀면서 월급만 받지 말고. 잊지 말고. 꼭!”
반박할 수 없는 박 부장은 겸연쩍은 듯 핸드폰만 만지작거렸다.
“…….”
“부장님의 핸드폰도 확인해보세요. 만에 하나 제 핸드폰이 해킹당해서, 잘못된 업무 메시지를 받을 수 있으니까요. 그럼, 제자리로 돌아가겠습니다.”
뻘쭘한 박 부장의 눈치를 살피던 김 과장은 뒤돌아서는 나를 다급히 불러 세웠다.
“홍 대리! 잠깐.”
사무적인 말투로 내가 천연덕스럽게 되물었다.
“네? 또 김 과장님이 하셔야 할 일을 늘~ 그랬듯이 저 혼자서! 또 알아서. 처리해야 하나요?”
진심이 담긴 내 비아냥거림에 김 과장은 불쾌한 표정으로 취조하듯 질문했다.
“들었어? 들었지. 들었구나. 어디까지 들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