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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완성 원고
작가 : 심해해삼
작품등록일 : 2018.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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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매월이 (4)
작성일 : 18-12-22     조회 : 334     추천 : 0     분량 : 5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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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지 도련님은 아편을 몇 모금 피우시더니 헤벌쭉 웃으시며 그림을 향해 말을 거셨소.

 

 꼭 사랑하는 연인한테 하는 것처럼 말이요.

 

  “매월아. 이놈이 츠기오다. 몇 번 말한 적 있지? 어린놈이 여간 야무진 게 아니야. 너한테 하는 이 조선말은 다 츠기오한테 배웠단다.”

 

  그리고는 내게 눈치를 주시더군.

 

  “뭐해, 인사하지 않고서는. 매월이도 너랑 같은 조선인이다. 좀 더 일찍 소개해주고 싶었지만 우리 매월이가 여간 낯을 가리는 게 아니라서 말이야. 봐라, 나오미 형수님보다 더 곱지? 내가 별의별 여자를 만나봤지만 우리 매월이보다 더 참한 여자는 없더라.”

 

  말을 잇는 신지 도련님의 모습은 내가 아는 신지 도련님과 달랐소. 그래, 꼭 미친 사람 같았지. 나는 나도 모르게 뒷걸음 쳤소. 그런데 뭔가 바스락하고 발에 밟히더군.

 

  가만 보니 예전에 내가 꺾어다준 꽃이었소. 얼마나 그 자리에 오래됐는지 건초처럼 바짝 말라 있더이다. 꽃뿐만이 아니었소. 지금까지 내가 사다 날랐던 옷이며, 화장품이며, 장신구며 모두 그림 앞에 어지럽게 널려 있었지.

 

  신지 도련님은 내가 무슨 심정인지 모르시는 건지 연거푸 아편만 피우셨소. 그러다가 갑자기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시더군.

 

  “매월아! 이 못된 계집아! 서방이 왔는데 언제가지 그렇게 새초롬하게 있을 거냐, 응? 이제 그만 눈 좀 뜨고 이 서방을 알아보란 말이다. 히히히힉! 그래, 그래! 우리 매월이 참 곱다. 매월아, 매월아. 우리 임자. 우리 아버님이 미련하신 분이라 매월이 너 같이 참한 며느릿감을 못 알아봐서 야속하지? 괜찮다.

 

 내가 너를 어떻게든 데리고 살겠다. 첩? 무슨 소리야! 네가 있는데 무슨 첩이야, 첩은! 나는 너 밖에 없다. 그러니까 이제 입을 열어 뭐라고 말 좀 해다오. 내가 꽃이랑 옷이랑 네가 좋다는 건 뭐라도 다 해주마! 한 마디만, 한 마디만 해주련. 그게 어렵니? 응? 헤헤헤헤. 야속한 내 님아, 어여쁜 내 님아. 흐흐헤헤흐흐흐. 서방에게 말 한마디 안 해주는 못된 내 님아! 아하하하흐흐흐흑”

 

  울다가, 웃다가, 욕을 하다가, 어르다가.

 

  신지 도련님의 발작은 평소 친근한 모습만 봐왔던 내게 있어 엄청난 충격이었소. 신지 도련님은 내가 있었다는 것도 잊은 채 그림 앞에서 애절하게 사랑을 구걸하셨지.

 

 눈을 뒤집고, 침을 흘리고 바닥을 벅벅 긋고 몸을 이리 저리 뒤틀기까지 하셨소. 난 그 모습을 보다 못해 별채 밖으로 뛰어나왔다오.

 

  그런데 때마침 근처에 있던 나오미 마님과 마주쳤지.

 

  나오미 마님은 내 표정을 보더니 무서우리만큼 단호한 표정으로 물으셨소.

 

  “봤구나. 그렇지?”

 

  충격이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나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소. 그러자 나오미 마님은 짧게 한숨을 쉬셨소.

 

  “너도 봤겠지만, 도련님은 정상이 아니야. 마음이 아프셔. 경성에서 돌아온 그 날 별채 안의 그림을 보여주며 혼례를 올리고 싶다고 말하시더구나. 우리 모두 그 말을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아버님인 충격으로 거의 쓰러질 뻔 하셨어. 우리 그이는 칼을 뽑아 들고 그림을 베어 찢어 버리겠다고 길길이 날뛰었지.

 

  헌데 도련님이 만약 그림에게 무슨 짓이라도 하면 불 지르고 다 같이 죽어버리겠다고 거품을 무시는 바람에 그러진 못했어. 부탁이다. 오늘 본 일을 못 본 척 해다오. 만약 이게 바깥사람들이 알게 돼서 흠이라도 잡히면, 정말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몰라.”

 

  나오미 마님의 당부에 나는 연신 고개만 끄덕였소. 사실 바깥에 퍼트리고 다닐 것도 없었소. 그림에게 빠져서 그림과 맺어달라고 조르는 차남이라니. 그런 걸 누가 믿겠소? 나조차 내 눈으로 직접 보지 못했다면 실없는 소리 하지 말라고 했을 게 분명하오.

 

  이후 나는 의도적으로 신지 도련님과 거리를 뒀소. 한 번 실성한 모습을 보니 도저히 같이 있고 싶지 않더군. 무엇보다 눈을 까뒤집고 그림을 매월이라고 부르짖는 그 모습이 뇌리에서 잊혀 지지 않았다오.

 

 신지 도련님은 내심 섭섭해 하는 것 같았지만, 대놓고 추궁하지는 않으셨다오. 내 생각이지만 본인도 대강 이유를 짐작하고 계셨던 것 같소.

 

  그리고 그 해 8월 15일, 해방이 찾아왔소.

 

 

 

  * * * * *

 

 

 

  “그 정도로 심했다면 차라리 정신 병원에 보내는 게 낫지 않았을까요?”

 

  이야기를 듣던 효정이 묻자 세욱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인식이 많이 달라졌지만, 그때만 해도 집안에 정신병자가 있다는 건 엄청난 창피였소. 그래서 가족 중에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이 나타나면 숨기기 급급했지.

 

 더구나 마쓰다 어르신은 체면을 중요하게 생각하던 사람이었소이다. 만약 차남에게 문제가 생겼다는 걸 알면 마쓰다 집안은 하루아침에 손가락질 대상이 될게 불 보듯 뻔했소. 그나마 다행인 것은 신지 도련님이 별채 밖으로 외출을 전혀 하지 않으셨다는 거요.

 

 잘만 숨기면 아무도 모를 일이었지. 그래서 가족들 중 그 누구도 신지 도련님의 진실에 대해 대놓고 말을 하지 않았던 것이오. 나 역시 만약 그 날 들어가지 않았다면 영영 몰랐겠지.”

 

 

  세욱은 크게 헛기침을 하고는 다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 * * * *

 

 

 

  마쓰다 어르신은 수지타산이 정말 빠른 분이었소.

 

  패전 소식이 들려오자 그분은 누구보다도 빠르게 짐을 꾸렸소. 우리 하인들에게는 이렇다 할 지시도 내리지 않고, 정말 중요한 물건만 챙기고 식솔들만 꾸려서 바로 일본으로 돌아가셨지. 물론 누가 나서서 이 나라를 떠나라고 다그쳤던 건 아니오. 다만 본인이 평소에 조선인들에게 한 짓이 있던 만큼 어서 뜨는 게 이롭다고 생각했던 것 같소.

 

  떠나던 그 날, 마쓰다 어르신과 준이치로 도련님은 하인들조차 대부분 잠들어 있는 새벽에 저택을 나가셨다오. 나는 다른 사람보다 일찍 일어났기 때문에 우연찮게 그분들이 도망치는 걸 볼 수 있었지. 양 손 가득 집을 들고 정말 믿을 사람 몇몇만 동행한 채 황급히 발걸음을 옮기던 모습은 아직도 눈에 선하오. 내가 믿고 따르던 과연 그분들이 맞나 싶을 정도로 궁색했거든.

 

  무엇보다 그분들은 그냥 가지 않았소. 어디서 고용했을지 모를 장정 여럿을 호위하듯 옆에 두고 있었는데, 등치 큰 몇몇이 커다란 궤짝을 짊어지고 있었소이다. 그래서 멀리서도 눈에 띄더군. 난 곧바로 후다닥 뛰어갔소. 일본인이 되어 잘 먹고 잘살고 싶었던 만큼 그분들을 영영 놓치면 기회가 날아가 버릴 것 같았소이다.

 

  “잠깐만요! 저도 데려가주세요!”

 

  나는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쫓아갔소. 여차하면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데려가 달라고 떼라도 쓸 생각이었소. 그런 나를 나오미 마님이 막아섰소이다. 나오미 마님은 슬픈 얼굴로 나를 한참이고 바라보시다가 차분하게 이르셨소.

 

  “츠기오야, 지금까지 고마웠다. 하지만 우리는 너를 데려가 줄 여유가 없어. 미안하다. 넌 똑똑하고 눈치가 빠르니 어딜 가도 잘 살 거다. 작별 선물이다. 필요할 때 쓰렴.”

 

  그러면서 손에 끼고 있던 금가락지를 빼서 내 손에 쥐어주셨소. 눈물이 나왔지만 차마 더 조를 수가 없어서 우두커니 그분들이 가는 걸 지켜만 봤지. 그런데 궤짝 소리에서 낮은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소. 신지 도련님의 것이 분명했지.

 

  준이치로 도련님이 그 소리를 듣자마자 사색이 되시거니 나오미 마님을 재촉하셨소. 깨어나기 전에 어서 배에 타야 한다고 하시더군. 나오미 마님은 곧바로 남편을 따라 선착장으로 향하셨소. 차마 더 이상 데려가 달라는 말을 하지 못하고 점점 내게 멀어지는 걸 그저 지켜만 봤다오.

 

  해방 이후 곳곳에서 만세가 울려 퍼졌소. 별의별 나쁜 짓을 저질렀던 일본인들이 전쟁에서 지고 헛간에 몰래 숨어든 도둑놈처럼 도망쳤단 말에 너나 할 것 없이 기뻐했지. 하지만 일본의 패전을 반가워하지 않은 조선인들도 있었소. 나 같이 일본인들에게 아첨해 그들이 흘린 부스러기를 핥아 먹고 살았던 놈들 말이요.

 

  난 당시 솔직히 일본의 패전을 믿을 수 없었다오. 어안이 벙벙했지. 내게 있어서 일본은 정말 완전무결한 부자 나라였으니까. 그런 나라가 미제한테 졌다니.

 

  나는 내일이라도 일본에서 승전가가 들려오고 마쓰다 어르신과 그 식솔들이 저택하지만 입에서 입으로 들려오는 소식은 내 예상과 정반대였소. 큰 폭탄이 떨어지고 일본 본토가 초토화가 됐다더군. 마쓰다 일가가 무사한지 기약 할 수도 없었소.

 

  난 그때서야 뒤늦게 살 궁리를 찾아야겠단 생각이 들었소이다.

 

  그러던 중 우연찮게 미군과 인연이 있는 미국인 선교사를 알게 됐소.

 

  그는 한국에 예수교를 알리는데 정말 열성적이었지. 난 정말 신실한 신자인척 접근해 그의 환심을 샀소. 신지 도련님에게서 배운 토막 영어도 나름 도움이 됐지. 난 매일 기도를 핑계 삼아 그에게 달라붙어 영어를 배웠소.

 

  믿음이니, 구원이니 하는 건 추호도 관심도 없었소이다. 나는 그냥 일본이 망했으니, 대신 미국의 편에 붙으면 되겠다고 생각했을 뿐이요. 박쥐같은 놈이라고 욕을 해도 상관없소. 난 그냥 어떻게든 잘 먹고 잘 살아야겠단 생각 밖에 없었소이다.

 

  영어 실력이 어느 정도 늘자, 나는 선교사의 추천으로 미국 군부대에 취직했소. 내가 하는 일은 그냥 자질구레한 심부름이 전부였지만 어찌 끼니는 이을 수 있었지. 미군 군부대에서 일하면서 종종 받는 통조림이나 술 같은 걸 시장에 내다팔아도 나름 벌이가 짭짤했다오.

 

 으로 돌아올 것 같았소. 아니, 그렇게 굳게 믿었지.

 

  그렇게 미군 군부대에서 일한지 몇 달 정도 지났을까, 군부대에서 받은 부식을 내다 파려고 시장에 나왔는데 어째선지 저잣거리가 떠들썩한 거요.

 

  사람들이 모두 모여 빙 둘러 모인 채 욕을 퍼붓고 소리를 지르느라 정신이 없더군. 난 슬쩍 호기심이 동해 발걸음을 옮겼소.

 

  거기엔 웬 넝마주이를 걸친 남자가 주저앉아 펑펑 울고 있었다오. 오랫동안 굶은 것인지 삐쩍 마른데다 수염이고 머리고 헝클어져서 꼴이 말이 아니었지.

 

  누가 돌이라도 던진 건지 머리엔 피까지 흐르고 있었소. 그런데 가만 보니 어째 낯이 익은 거요. 곧 바로 온 몸이 소름이 돋았소.

 

  그 남자는 다른 아닌 신지 도련님이었소.

 

 신지 도련님은 자신에게 손가락질 하는 사람에게 악을 썼소.

 

  “대체 왜 이러는 겁니까! 저는 제 아내를 데리러 왔습니다! 그냥 아내만 데리고 가겠습니다. 제발 이러지 마세요. 매월아! 매월아! 어디 있느냐! 내가 왔다! 매월아! 다들 비켜! 어서! 매월이가 날 기다리고 있단 말이다. 매월아! 매월아!”

 

  반쯤 실성한 얼굴로 매월이의 이름을 부르는 그 모습은 애절하다 못해 무섭기까지 했소. 어떤 고생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못 본 사이에 몇 십 년은 팍 늙어버린 것 같았지. 하지만 시장 사람들은 가차 없었소.

 

  “여기가 어딘지 알고 와! 썩 일본으로 꺼져!”

 

  앞장서서 신지 도련님에게 호통을 치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나는 똑똑히 기억하오. 평소 마쓰다 어르신의 시종 노릇을 하던 작자였소. 아첨하는 솜씨 하나는 탁월했지. 가족들도 무시하는 신지 도련님에게 낯부끄러울 정도로 깍듯이 존댓말을 썼을 정도였다오.

 

 그런 사람이 앞장서서 신지 도련님을 다그치고 있다니. 어찌 보면 참 웃긴 광경이었지.

 

  어쨌든 마쓰다 어르신에게 당한 게 있는 사람들은 신지 도련님에게 신나게 욕설을 퍼부었고, 마쓰다 어르신에게 굽실거리던 사람들은 행여 자신들의 과거가 추궁될까 무서워 더 큰 목소리를 냈소.

 

 신지 도련님은 앉아서 맥없이 오는 돌을 정면으로 맞기만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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