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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산드라
작가 : 건망고
작품등록일 : 2017.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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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앉아서 신탁을 기다린다
작성일 : 24-03-29     조회 : 39     추천 : 0     분량 :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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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눈을 떴을 때 내 눈에 보인 건 그 체스판 천정이었다.

 그리고 시간을 들여 다시 몸을 일으키고 바닥에 발을 댔다.

 역시 내 발이 아니다.

 

 둘러보니 그제서야 세면대와 거울이 보인다.

 그 옆에 변기가 있다.

 천정과 바닥의 체스판.

 여기는 침대가 놓여 있는 큼지막한 화장실이다.

 

 세면대 위 벽거울을 향해 걷는다.

 나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거울 속을 들여다본다.

 모르는 얼굴이다.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얼굴이다.

 

 가만히 서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의 비현실성에 대해 곰곰 생각해본다.

 너는 무엇인가?

 나는 무엇인가?

 이게 내가 받은 신탁이었던가?

 

 찬찬히 보니 무척 잘생긴 얼굴이다.

 키도 180은 족히 넘어 보인다.

 더욱 비현실적인 것은 이 남자의 피부 상태다.

 정말 잡티 하나 없이 매끈하다.

 얼굴 뿐 아니라 온 몸의 피부가 깨끗하다.

 막 생산된 공산품 같은 몸이다.

 

 옷을 벗어 본다.

 온 몸 구석구석을 살펴본다.

 깨끗하다.

 지나치게 깨끗하다.

 그래서 의심해본다.

 사람의 몸이 아닐 지도 모른다고.

 이건 어쩌면 사이보그의 몸인 거다.

 나는 새로 발명된 사이보그 몸에 의식이 이식되는 행운을 얻은 거다.

 

 그런데 곰곰 다시 생각한다.

 어째서 나의 의식일까?

 나 따위는 그저 섬처럼 살아온 메신저에 불과하다.

 나는 원래의 내 몸에 온전히 들어있을 때도 내가 무엇인지 몰랐다.

 그런 나 따위에게 왜 이런 과분한 기회를 주는가.

 

 그래서 생각을 고쳐 먹는다.

 이 몸은 사이보그의 몸일 리는 없다.

 이 몸은 분명 사람의 몸이다.

 체취가 있고 기색이 느껴진다.

 체온도 있고 추위도 느껴진다.

 

 다시 옷을 입는다.

 그리고 가만히 침대에 걸터앉는다.

 어차피 신탁은 이뤄졌다.

 그리고 나는 어차피 신탁이 말하는 바에 따르는 자다.

 가만히 앉아서 신탁을 기다리면 된다.

 신탁이 없다면 아직 때가 되지 않은 것이다.

 만일 이대로 나를 굶겨 죽이거나 할 작정이라면 이런 몸에 나를 넣어둘 필요조차 없었다.

 

 여기 가만히 앉아서 생각을 지운다.

 그저 신탁을 기다린다.

 눈을 감는다.

 

 눈을 감고 한 시간 정도가 지났을 때 천정이 열렸다.

 택배 상자처럼 가운데가 쭉 갈라지더니 위로 열렸다.

 이곳은 큼지막한 화장실이고 큼지막한 택배 상자다.

 

 그리고 그 위로 무슨 장치 같은 게 음식을 날랐다.

 인형 뽑기 기계의 집게 같은 거였다.

 침대에 걸터앉은 내 무릎 위에 음식이 정확히 배송되었다.

 택배 상자 안에 앉아서.

 인형 뽑기 손으로.

 음식을 배송 받았다.

 

 식판에 든 음식은 꽤 충실했다.

 영양적 균형을 고려한 효율적이고 특색 없는 음식.

 사이보그에게 주는 음식다웠다.

 공산품이나 다름 없는 깨끗한 몸을 유지시키기 위해 딱 필요한 영양만 들어 있는 식사.

 

 나는 맛있게 비워줬다.

 이미 나는 이 상황에 깨끗이 적응했고 모든 것을 달게 받아들였다.

 밥도 제때 나오는 것 같으니 걱정도 하나 줄었다.

 화장실도 바로 옆에 있다.

 침대도 있다.

 

 체스판 패턴의 천정과 바닥도 꽤 맘에 든다.

 무엇보다 이 모델 같은 몸이 맘에 든다.

 원래 내것과 정이 들었지만 깨끗이 단념할 수 있을 만큼 근사하다.

 나는 여기에도 적응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나는 식판을 바닥에 아무렇게나 놓고 다시 침대에 걸터앉는다.

 다시 눈을 감는다.

 그저 생각을 비우고 쳇 베이커의 음성을 떠올린다.

 'Everything Happens To Me'가 머릿속에서 연주된다.

 나는 상상의 반주에 내 트럼펫 소리를 얹는다.

 코드 진행에 맞춰서 임프로바이징을 한다.

 나는 미소 짓는다.

 나는 내 운명을 달게 받아들이기로 한다.

 

 Everything happens to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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