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연재 > 무협물
은거기인
작가 : 건아성
작품등록일 : 2016.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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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화
작성일 : 16-11-23     조회 : 421     추천 : 0     분량 : 46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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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화

 

 

 

 

 

 “그윽…… 끅!”

 그가 눈물을 토해낸 지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바닥이 축축하게 젖을 만큼의 눈물을 쏟아내고 나서야 우억은 곡을 멈추고 가쁜 숨을 토했다. 토끼눈처럼 벌겋게 달아오른 눈시울이 금방이라도 더 눈물을 쏟아낼 것 같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우억은 사내다.

 한 번 털어 버린 눈물을 다시 끄집어낼 만큼 약하지 않다.

 『이제는 이야기를 좀 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아…… 추한 꼴을 보였군. 그래, 해 주어야지. 너는 그 이야기를 들을 권리가 있으니까.”

 창천은 눈물을 털고 일어서는 우억의 모습을 보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을을 떠난 아버지의 이야기는 그렇게 밤이 다 새도록 계속되었다.

 

 “그래서…… 나는 결국 관군에 쫓기다 산적이 되어 버렸어. 그것밖에는 길이 없었지.”

 길고 긴 이야기.

 가슴에 쌓인 이야기를 털어낸 우억의 표정이 조금은 밝아졌다.

 생각해 보면 그동안 이 말을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가슴에 가득 찬, 그래서 미치고 싶을 만큼 무거운 무게를 덜어내고 싶었는 지도 모른다.

 『……정말 그 길밖에는 길이 없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응?”

 지금껏 조용히 말을 들어주던 창천의 눈빛이 돌연 변했다.

 산적이 된 자신을 책망하는 듯한 눈빛…….

 그 길밖에는 없었느냐고?

 우억은 그렇게 물어오는 창천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그밖에 길이 또 무에 있겠어! 죽는 것? 그래, 죽으려고도 생각해 봤어. 헌데, 헌데…… 그럴 수가 없었다. 가슴에 찬 한이…… 그놈들에 대한 복수심이 나를 살지도 죽지도 못하게 했어. 괴로웠다고! 죽는 것보다 더! 사는 게 더!”

 『그래서 그와 닮은 이들을 베고, 지금 이렇게 난민들의 화전을 찾아 그들의 터전을 다시금 망가트리려 하셨습니까?』

 “그건……!”

 우억은 날카롭게 말을 찔러오는 창천의 모습에 발끈해 소리쳤다.

 가벼워졌던 마음이 다시금 무겁게 내려앉는다.

 뭐라 하고 싶은 말들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정작 밖으로 뱉을 수가 없었다.

 변명이다.

 어떻게 말한다 하여도 그건 치졸하고 한심한 변명일 뿐이다.

 하지만, 하지만 그래도…… 결국 뱉을 수밖에 없다.

 무거워진 마음을 비우려면, 그의 원망을 지우려면!

 “……빌어먹을 세상이야. 어쩔 수 없는 일도 있는 거라고. 지금까지 이들을 가만히 두고 있었어. 두목이라고 있는 자식 밑에서 최대한 붙어서 노력했어. 그놈이 나서면 다시 잿더미가 될 것을 아니까 내가 나서…….”

 『칼을 들었다?』

 힘겹게 새어 나온 말을 칼처럼 자르고 들어오는 창천의 말에는 분노가 짙게 배어 있었다.

 우억은 쳐다볼 수도 없을 만큼 매섭게 변해 있는 창천의 눈빛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나는…… 내가 있는 위치에서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하려 했을 뿐이야.”

 『그리 제 눈을 피하는 것을 보니,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시는 듯한데 어째서 그렇게 잘못된 선택을 옹호하려 하시는 것입니까? 잘못된 선택은 되돌리면 그만입니다. 애써 잘못된 선택을 옹호하고 납득시키려고 하지 않아도 됩니다.』

 “선택을 돌리는 것이 쉬운 줄 알아? 그런 입에 발린 말들은 너희나 할 수 있는 거야. 배운 게 있는 너희나…… 여기 엮여 있지 않는 너희나 가능한 거라고. 우리는, 이렇게 엮여 버린 우리…….”

 우억은 너무나 쉽게 말을 뱉는 창천의 모습에 입술을 깨물었다.

 그가 하는 말이 옳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 그 옳은 말을 따르는 것은 쉽지 않다.

 세상은 그리 만만치 않다.

 말만으로 살 수 있는 세상은 그 어디에도 없다.

 『무엇이 우억님을 엮고 있는 것입니까? 무엇이 우억님의 잘못된 선택을 되돌릴 수 없게 하는 것입니까?』

 “그런 뻔한 것을 왜 물어. 조직이라는 게 들어갈 때는 쉬워도 나오기는 힘든 거야. 아니, 과연 조직이 사라지기 전에 나올 수나 있을까?”

 『과연…… 그것입니까?』

 창천은 시선을 피하는 우억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뭘 그렇게 웃는 거야? 네가 농민군 참전자의 아들이라고 해도 나를 비웃는 것만큼은 용서……!”

 『그렇다면 그 조직이 사라지면 제 부탁 하나만 들어주시겠습니까?』

 “뭐……?”

 『예, 꼭 들어주셔야 하는 부탁입니다. 저는 이제 홍화주를 사러 가야 하거든요.』

 “그게 무슨…… 홍화주라니? 부탁이라니?”

 갑작스런 말을 이해하지 못해 동그랗게 눈을 뜬 우억을 바라보다가 창천은 휙 몸을 돌렸다.

 중중무진이라…….

 겹겹이 쌓인 인연이 인연을 낳고 있었다.

 노인과 했던 약속.

 길게 갈 것이라 생각했던 그 약속을 단번에 마무리 지을 수 있게 되었다.제9장 홍화주

 

 

 

 

 

 콰직!

 마른 나무가 부서져 하늘을 날았다.

 곧게 뻗은 권을 타고 흐르는 바람이 눈이 아플 정도로 강하게 불어왔다.

 휘익―

 사내는 조각조각 박살이 나 날아가는 의자를 뜨악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의자는 앉으라고 있는 것이지, 던지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웃는 얼굴에서 흘러나온 정중한 한 마디.

 그것은 사내가 정신을 잃기 전 마지막에 들었던 말이었다.

 

 * * *

 

 “그래, 젊은 서생 하나가 홍화주를 찾는다고?”

 “예! 오래 묵은 것으로 한 병 달라 하던뎁쇼.”

 “오래 묵은 것?”

 홍화루(紅花樓)의 외홍루주 추상위는 헐레벌떡 달려온 점소이의 말에 얼굴을 찡그렸다.

 어울리지 않는 자가, 어울리지 않는 물건을 찾는 것만큼 좋지 않은 일도 없다.

 그가 어울리지 않는 일에 자칫 몸이라도 상한다면?

 휘휘 고개를 내저었다.

 한동안 장사를 못할 만큼 일이 시끄러워질 것이다.

 세상에 서생들처럼 시끄러운 족속들이 또 없지 않은가.

 객기가 부른 내기였는지, 아니면 다른 세상에 대한 동경이었는지는 몰라도 서생에 홍화주라니, 좋지 않다.

 “그는 어디에 있느냐?”

 “객잔 1층에 있을 것입니다. 직접 데리고 올까 하다가, 아무래도 서생인지라…….”

 “하하! 네놈이 이젠 제법 수를 읽을 줄 알게 된 모양이구나. 그래, 잘했다. 그는 지켜볼 필요가 있다. 지금껏 홍화주를 찾은 다른 이들과는 다르지. 서생이 홍화주를 찾는다니…… 허허.”

 추상위는 홍화주를 찾는다는 서생의 상황을 유추해 보며 걸음을 옮겼다.

 어울리지 않는 상황이기에 그러한 것일까?

 다른 이들과 같이 정상적이고 평범한 답이 나오지 않았다.

 “흠, 홍화주를 찾았다는 서생이 저 사람이냐?”

 “예, 나으리. 저기 저 흰 장삼의 사내입니다. 올라오라 말을 전할깝쇼?”

 “아니, 아니다. 조금은 더 두고 보는 것이 나을 듯하구나. 그래, 홍화주를 찾는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 어디 그 이유나 한 번 알아봐야겠구나.”

 “예?”

 추상위는 반문하는 점소이를 손짓 한 번으로 물리고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붓처럼 반듯하게 허리를 세우고 앉아 있는 모습이 눈길을 잡아 끌었다.

 과연 서생이라는 말이 틀리지 않는 사내다.

 그 모습이 태산처럼 크진 않으나, 대쪽과도 같은 곧은 눈빛이 마음에 남는다.

 게다가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것이 사내의 허리춤에 매여 있어 시선을 끌었다.

 검(劒)이다.

 서생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것이 허리춤에 덩그러니 매여있다.

 ‘헌데 그것이 의식하지 않으면 너무나도 자연스럽다는 말이지…….’

 추상위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검을 끌어안고 있는 서생을 바라보며, 톡톡 상머리를 두드렸다.

 홍화주를 찾는 서생이라…….

 위험한 냄새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톡, 톡, 톡.

 왁자지껄하게 돌아가는 주루를 바라보며 창천은 꿔다 놓은 보릿자루마냥 자리에 앉아 있었다.

 생전 처음 와 보는 고급 주루여서 그랬을까?

 처음 들어설 때는 느끼지 못했던 많은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호화롭게 장식된 주루의 모습과 자리한 손님들의 행동 하나하나가 어깨를 짓눌러 왔다. 산을 떠나 주루에 올 때까지 단 한 번도 생각지도 못한 문제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술 값.

 점소이들이 손에 쥔 가격표를 흘깃 흘려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오랜 시간 산에 머물렀다.

 사회라는 곳이 산처럼 무전으로 돌아갈 리가 없는 것을 그만 망각하고 있었다.

 “흠흠! 홍화주를 찾으셨지요? 저를 따라오시지요, 손님.”

 『아, 저…….』

 창천은 어느새 다가와 말을 건네고는 휙, 2층으로 올라가 버리는 점소이를 따라 주춤주춤 걸음을 옮겼다.

 처음부터 물어야 했을 가격을 어째서 묻지 않았는지, 뒤늦은 후회가 들었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다.

 어차피 값이 비싸다 해서 걸음을 돌릴 수도 없었던 일이 아닌가.

 도축장에 억지로 끌려가는 소처럼 점소이를 따라 걷는 가슴이 무거워졌다.

 “모셔왔습니다. 외홍루주님.”

 1층보다 배는 더 화려한 2층의 별실.

 창천은 고개를 숙이고 자리를 빠져 나가는 점소이를 바라보며 머쓱히 웃었다.

 점소이가 빠져 나간 그곳에는 한상 그득하게 차린 요리와 술, 그리고 한 사내가 앉아 있었다.

 “잘 오셨습니다. 일단 이리 앉으시지요.”

 자리에서 일어나 앉기를 권하는 사내를 보며 창천은 엉거주춤 자리를 틀고 앉았다.

 최고급 비단을 덧입혔는지, 앉은 의자는 엉덩이가 미끄러질 만큼 보드랍고 폭신했다.

 “저는 이 홍화루의 외홍루주 추상위라고 합니다. 홍화주를 찾으신다지요? 그것도 오래된 놈으로.”

 『아…… 예. 그렇습니다만…….』

 빤히 뚫어져라 바라보는 추상위의 눈빛을 피해, 창천은 교묘히 입술을 가려 말했다.

 “흠……. 이유를 묻는 것은 불문이니 묻지 않겠습니다만, 정말 사시겠습니까? 홍화주는 그리 만만치 않습니다.”

 『그렇습니까? 하지만 그렇다 해서 이대로 돌아갈 수도 없으니…….』

 “꼭 맡아야겠다?”

 창천은 살짝 말아 올라가는 추상위의 입꼬리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을 위해 돌아온 길이 천 리요, 지난날만 해도 삼 개월이 넘는다.

 지금껏 선인곡에서 홍화주를 기다리고 있을 소요자를 위해서라도 물러설 수 없는 선택이다.

 “흐음……. 그렇게 말하신다면 어쩔 수 없지요. 적당한 것을 밖에 점소이에게 일러두었습니다. 뒷일이 커질까 쉬쉬하고들 있는 홍화주인데……. 뭐, 그것은 스스로 해결해야 할 일이니, 저는 그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아, 저…….』

 창천은 말할 사이도 없이 웃으며 휙 별실을 빠져 나가는 추상위의 모습에 멍하니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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