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조선 왕실의 통역관
글쓴이 : 스토리야  16-12-13 17:48   조회 :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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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왕실의 통역관

사역원(司譯院)
사역원은 고려·조선시대 외국어의 통역과 번역에 관한 일을 관장하기 위해 설치되었던 관서이다.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에는 대외 관계가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므로 역학과 그 교육도 성행했을 것으로 추측되나
기록이 영세해 자세한 것은 알 수가 없다.
다만 1276년(충렬왕 2)에 처음으로 통문관(通文館)을 설치해 한어(漢語)를 습득하게 했으며,
뒤에 사역원을 두고 역어(譯語)를 관장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고려 말인 1389년(공양왕 1)에 십학(十學)을 설치해 사역원에 이학교수(吏學敎授)를 두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이때에 설치되어 역학 및 이학 교육을 담당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고려의 제도를 이어받아 태조 때 역학 교육에 힘써 육학(六學)을 설치, 양가의 자제들을 뽑아 교육시켰다.
1410년(태종 10) 1월, 몽학에 훈도관을 설치했고, 1414년에는 왜학 학습에 관한 영(令)이 내려졌다.
1434년(세종 16) 6월에는 여진학훈도를 설치하는 등 초기에 이미 사역원의 기능을 마련하였다.
이러한 제도의 정비에 따라 ≪경국대전≫에 명문화되었다.
법제도 정비에 따른 외국어로는 한학(漢學)·몽학(蒙學, 몽고어)·왜학(倭學, 일본어)·여진학(女眞學 : 뒤에는 청학(淸學)) 등을
주로 취급하였다.
관원은 정(正, 정3품) 1인, 부정(副正, 종3품) 1인, 첨정(僉正, 종4품) 1인, 판관(判官, 종5품) 2인, 주부(主簿, 종6품) 1인, 한학교수(漢學敎授, 종6품) 4인, 직장(直長, 종7품) 2인, 봉사(奉事: 종8품) 3인, 부봉사(副奉事, 정9품) 2인, 한학훈도(漢學訓導, 정9품) 4인, 청학·몽학·왜학훈도(정9품) 각 2인, 참봉(參奉, 종9품) 2인이 있었다. 그러나 뒤에 부정·판관·직장·봉사 각 1인을 감원하였다.
조선시대 사역원은 두 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는 사대교린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한어·몽어·여진어·왜어 등 외국어를 교육하는 교육 기관으로서의 기능이다.
둘째는 외국어의 통역과 번역 등을 맡아보는 일반 관부(官府)로서의 기능이다.
교육 기관으로서의 기능은 이미 고려시대인 1276년(충렬왕 2)에 통문관(通文館)을 설치하고 한어를 교육한 데서부터 시작되었다.
일반 관부로서의 기능은 조선시대부터 시작되었다.
조선시대 사역원은 종로구 적선동과 도렴동(都染洞)에 걸쳐 있었다. 규모는 동서가 23칸(間), 남북이 24칸(총 552칸)으로
대청(大廳)·상사당상청(常仕堂上廳)·한학전함청(漢學前銜廳) 등 30여 개의 청이 있는 거대한 것이었다.
사역원 학생 중에는 이미 문과에 합격하고 문신이 되어 관직에 있으면서 한어 공부를 위해 사역원에 와서
한 달에 15일간 공부하는 강이관(講肄官)이 있었다.
또 문과에 합격했으나 아직 다른 관직이 없이 사역원에서 한어 공부를 하는 강예관(講隷官), 그리고 일반 생도가 있었다.
강이관이나 강예관은 물론 양반층에 속하는 신분이었으나, 생도의 경우는 한때 2품 이상의 천첩자(賤妾子)인 천인도 될 수 있었다.
그러나 1482년(성종 13) 이후부터 천인은 생도가 될 수 없었으며, 향교(鄕校)의 생도나 양가(良家)의 자제 등
중인 또는 서얼에 속하는 신분들이 생도가 되었다.
조선 초기의 사역원 학생들은 체아직(遞兒職)을 받았고 학업성적이 특출한 학생은 종신토록 녹(祿)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다른 관직으로도 발탁되었으며, 부형제질(父兄弟姪) 등은 역(役)을 면제받았다.
그리고 친속자(親屬者)가 없는 사람은 봉족(奉足)을 지급 받는 등 대우가 좋았다.
그러나 예종·성종대로 내려오면서 여러 가지 특전이 없어졌다. 때문에 한때는 사역원에 학생이 없어 외국어 교육이
거의 단절될 위기에 봉착한 때도 있었다. 그렇지만 사대교린이라는 외교정책적인 필요성 때문에
역대 왕들은 꾸준히 역학(譯學)을 장려했고, 이로 인해 사역원 교육은 계속 유지되었다.
교수는 종6품직이고, 훈도는 정9품직으로 비교적 낮은 직급이었다. 그러나 교수는 정3품직에 해당하는 훈상당상(訓上堂上),
종4품직인 첨정(僉正), 정5품직인 도사(都事) 등을 지내고 칠사(七事)의 경력을 가진 교회(敎誨) 등
경험이 풍부한 인격자를 임명하였다.
훈도도 참상관이나 교회 중에서 임명했고, 사역원의 모든 관직이 체아직이었으나 교수와 훈도만은 정직(正職)으로 우대되었다.
조선 후기 사역원에 입학하려면, 부·모·처의 4대조 신원 조사서와 참상관 이상 2인과 교리 1인의 신원보증서를 제출해야 하였다.
15인의 심사관이 서류를 심사하고 비밀 투표와 같은 형식으로 추천을 받은 뒤, 다시 입학 시험을 보아서 합격해야 입학할 수 있었다.
만일 추천 과정에서 서류에 미비점이 있는데도 사적인 정으로 ‘가(可)’를 했다면 녹관(祿官)은 물론,
 보증인도 중죄를 받는 등 매우 엄격하였다.
사역원 시험 제도에는 대체로 원시(院試)·고강시(考講試)·취재시(取才試)·역과시(譯科試) 등 네 가지가 있었다.
원시와 고강시는 회화 교육을 포함한 전체 교육을 장려하기 위한 것인 동시에 취재와 역과시에 응시 자격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
취재시는 녹관직(祿官職)이나 위직(衛職)으로 임명하거나 또는 부경(赴京 : 중국으로 연행(燕行)하는 것)의 자격을 주기 위한 것이며,
역과시는 역관의 자격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
시험방법은 회화·강서(講書)·사자(寫字)·번역 등 네 가지가 있으며, 강서에는 배강(背講 : 경서(經書)를 보지 않고 외우게 하는 시험)과 임강(臨講 : 경서를 보고 그 뜻을 묻는 시험)이 있었다.
시험과목은 전공과목과 교양과목이 있었는데, 한학의 경우 전공과목이 우수하면 교양과목은 부족해도 합격시켰다.
몽학·왜학·청학 등에 있어서는 교양과목은 원하는 사람에게만 실시했으므로 합격과는 관계가 없었다.



출전 : 심양일기(瀋陽日記) 
저자 :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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