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연재 > 공포물
기현상 칼럼니스트
작가 : ILooK
작품등록일 : 202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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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반쪽이: 잃어버린 사람
작성일 : 22-01-28     조회 : 210     추천 : 0     분량 : 4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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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규 방송 중 보이는 뉴스 특보. 괴이한 생명체가 나타나 그 존재만큼이나 미스터리하고 수상쩍은 일을 벌였다는 소식은 들을 때마다 낯설지 않은 공포를 생산시킨다.

 

 재난 경보 알림은 쉴 새 없이 울려대고 초자연적 현상이 벌어지지 않았던 시대의 일은 옛 문헌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일이 되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이야말로 다시 한번 시간을 되돌려 가장 맨 처음, 기현상이 발생하고 알려졌던 그때의 사건을 재조명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느끼게 되었다.

 

 

 다른 주제도 많은데 왜 하필 재앙의 이름을 뒤집어쓴 비극적이며 잔인하고, 인간의 이해로는 그 본질을 이해하기 힘든 사건에 관해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가.

 

 계기를 찾는다면 사실 나는 딱히 할 말이 없다.

 

 나는 사람들이 믿기 힘들 정도로 평범한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비극이 없는 삶을 영위하는 것은 축복받은 일이지만 동시에 비극을 겪은 타인의 삶을 이해하기 힘들 것이라는 부정적인 시선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삶이 단 한 번도 선과 악으로 나뉘는 일 없듯 사건을 보는 시선 역시 다양한 의견이 필요하다.

 

 비극을 직접 겪은 자만이 나눌 수 있는 깊은 공감에서 바라보는 시각, 사건을 그 자체로 다루기 위한 제 3자의 입장에서 보는 객관성 그리고 사건을 통해 문제를 찾아내는 비판적인 시각.

 

 그리고 나는 후자의 입장으로서 글을 써 내려갈 것이다.

 

 왜냐하면 벌어진 모든 ‘재앙’은 개인인 내가 감당하기는커녕 이해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저 피해자가 사회에 남긴 의의가 무엇인지 찾아내는 것, 그것으로 나는 추모를 대신한다.

 

 

 하지만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대체 왜 이미 벌어진 재앙을 되새김질해야 하는가?

 

 이미 마음속에 심어진 공포와 슬픔이 충분치 않아서?

 

 오히려 세뇌되듯 새겨진 공포와 슬픔을 이겨내기 위해서다.

 

 두려움이라는 것은 공포의 대상을 알면 알수록 희미해지는 특성이 있기에.

 

 또한 괴이쩍고 무시무시한 이야기 속에 가려진 본질을 보기 위해서.

 

 

 나는 단 하나의 질문을 던지고 싶다.

 

 

 초자연적인 현상이 벌어지지 않았다면 정말 사건 관계자들에게는 그 어떤 비극도 존재하지 않았을까?

 

 

 한국에서 가장 먼저 기현상을 세상에 알린 사건은 일명 ‘스트리머 아씨’ 사건이다.

 

 당시 메타월드의 소규모 오컬트 채널을 운영하고 있던 스트리머 정아시는 신체의 반이 없는 남성이 출현한다는 제보를 받고 경기도 양주역 인근 야산을 방문했다가 그대로 실종되었다.

 

 

 실종

 

 

 세상에는 여러 가슴 아픈 단어가 존재하고 그중에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사라진 사람의 생사를 알 수 없을뿐더러 그 사람이 자의로 떠났는지 혹은 타의로 사라진 것인지 확인조차 불가능하다.

 

 원치 않게 사라진 이들을 생각하면 남은 자들은 걱정과 두려움으로 속이 타들어 가고 자의로 떠났다고 생각하면 죄책감과 무력감이 자신을 좀먹는다.

 

 

 하지만 스트리머 정아시의 실종은 ‘미스터리’라는 자극적인 뉴스 아래 주목받지 못한 개인의 비극과 그 속에 숨어있는 사회의 부조리 그리고 현재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비정함을 잘 보여주는 거울이 되었다.

 

 

 처음 그의 실종 소식이 들렸을 때, 언론과 사람들은 마치 한국 사람이 제작한 공포 영화가 전 세계 영화 수상식에서 최우수상을 휩쓸었다는 소식을 들은 것처럼 열광했다. 누군가는 그것이 ‘열광’이 아닌 ‘비극에 대한 동요’라고 설명할지 모른다.

 

 

 하지만 겉으로는 비극적인 소식인 양 포장하여 스트리머 정아시씨의 개인정보 유출부터 시작해 그의 채널과 당시 일명 그의 ‘구조대’로 참가했던 비인기 스트리머의 갑작스러운 순위 상승.

 

 게다가 실종 당시 실시간 방송을 직접 목격했던 시청자까지 뉴스와 방송에 출연하여 그 당시 상황을 상세하게 설명할 정도였으니 열광이 아니라 부정하기에는 어폐가 있다.

 

 

 마치 영화와 같은 일이 당시 현실에서 벌어졌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실시간 방송 중이던 스트리머의 실종, 미스터리한 존재의 등장, 해당 사건에 대해 무능력하기만 한 공권력 그리고 끊임없이 해당 사건을 팔아먹기 위해 포장하여 내보냈던 언론까지.

 

 

 이 당시 메타월드에서 스트리머 정아시의 실종을 다루었던 개인 방송만 하더라도 1,031여 개에 달하고, 그중 사건을 진지하게 다루었던 채널은 고작 20여 개에 이른다.

 

 즉, 대부분의 개인 스트리머는 실제 벌어진 실종사건을 자신의 채널을 키우기 위한 홍보용으로 사용했거나 혹은 후원을 받기 위한 용도로 소비했다는 이야기다.

 

 이로 인해 당시 정아시씨의 가족을 비롯하여 그와 친분이 있었던 이들 대부분의 개인정보가 유출됨은 물론, 이로 인해 발생한 피해는 끔찍할 정도였다.

 

 

 언론은 마치 그의 실종이 지속하기라도 바라는 것처럼 보도를 이어갔고, 언론의 주목을 받게 된 경찰은 사건을 최대한 빠르게 마무리 짓기 위해 스트리머 정아시의 행방 추적보다는 그가 이 모든 일을 작정하고 꾸몄을지 모른다는 기색을 은근히 흘리는 데에 집중했다.

 

 

 실종자를 찾는 데에 온 힘을 집중해야 할 실종자의 가족은 흘러나간 개인정보로 인해 기자, 스트리머부터 호기심 가득한 일반인까지 집 앞으로 몰려든 탓에 외출하는 것도 힘겨워했다.

 

 스트리머 정아시와 친분이 있다 생각되는 사람들에게 쏟아지는 불편한 관심은 그들의 마음속에서 자신과 연관이 있는 한 사람이 사라진 것에 대한 슬픔을 지워내고 불편함을 초래한 실종자에 대한 거부감을 자아내었다.

 

 

 타인의 고통을 유흥으로 소비하였다.

 

 

 가상 세계가 일상의 사적인 영역에서부터 공적 영역까지 지배하기 시작한 뒤 사회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이 사회 부적응 증후군.

 

 즉, 소시오패스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타인을 사람이 아닌 콘텐츠로 생각하는 이들이 늘어남에 따라 가상현실에서만 성향을 드러냈던 이들이 현실 세계에도 자신을 숨기지 않게 되었다.

 

 이러한 성향은 점차 현실 세계에 영향을 주기 시작했고 소시오패스 성향을 가진 이들은 시청률이라는 성과를 올림에 따라 주요 직책으로의 승전 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타인에게 공감하지 못하는 것, 타인을 사람처럼 여기지 못하는 것을 유행처럼 따라 했다.

 

 

 타인과 맺는 관계는 점점 무미건조하게 변했고, 무의식적으로 애정을 바랐으나 타인의 인정과 애정을 받지 못하는 이들은 점차 공격적으로 변해갔다.

 

 애정 결핍은 공격성과 집착으로 이어졌다.

 

 얼굴이 알려진 이들을 마치 사이비 교주처럼 떠받들었으나 어느 순간, 자신이 우상처럼 생각하는 인물이 ‘사람’인 것을 인지하는 순간이 오면 금세 돌아서 그의 가장 악질적인 안티가 되었다.

 

 한 사람에 대한 맹목적인 애정을 퍼붓는 것이 유행처럼 번졌으나 그 이면은 동시에 악질적인 안티가 생성되었다.

 

 

 하지만 그러한 관계조차도 서서히 단절되기 시작했다.

 

 결국 사람의 일생이 그들에게는 즐길 수 있는 이야기로 전락하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돈과 명성을 얻기 위해 얼굴을 노출하는 이들은 자기 스스로를 도구화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시대가 도래하고 말았다.

 

 외모부터 성격, 말투와 가족 그리고 친구 관계까지 모든 것을 콘텐츠로 만들고 여기는 세상.

 

 죽음까지 완벽한 결말로 받아들여지는 사회.

 

 

 그래서 ‘스트리머‘ 정아시씨의 실종은 정아시라는 스트리머 ‘콘텐츠’의 가장 완벽한 결말로 손꼽혔다.

 

 사람들은 오컬트 스트리머답다며 실종된 그를 추켜세우기 바빴고, 누군가는 의도된 실종이든 아니든 다시 나타나지 말아 주었으면 좋겠다는 의사를 직접 밝히기도 했다.

 

 그 역시 오컬트 스트리머였는데, 은근히 부러워하는 어조라 느껴지는 건 내 착각이었을까.

 

 

 나는 메타월드에 자주 접속하지 않는다.

 

 사람들에게 유리된 현실세계에서 마치 연못에 갇힌 물고기처럼 단조로운 생활을 반복하며 살고 있다.

 

 정보를 얻는 것도 라디오나 책, 기사를 보며 얻고 실제 필요한 물건은 오프라인 상점에서 구매한다.

 

 빅데이터가 추천한 옷이나 제품보다는 내가 실제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 본 다음 사는 걸 더 선호하고, 여행을 가거나 혹은 맛집을 찾는 것도 가상 지도나 내비게이션을 활용하기보다는 온종일 소비하더라도 길을 잃어가며 끝끝내 찾아가는 것을 좋아한다.

 

 

 이런 내가 오랜만에 메타월드에 접속했다.

 

 메타월드에서 추천하는 여러 채널과 영상을 접속해보니 몇 가지 눈에 띄는 영상이 보였다.

 

 멋들어진 인테리어, 자기 스스로 조율할 수 있는 하루 루틴, 사람에게서 나오는 스트레스를 받지 않아도 된다는 점, 오로지 자기 자신을 위해 돈을 쓸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완벽한 ‘현대인’이라는 점까지.

 

 시청자들은 하나같이 이런 이들을 부러워했다.

 

 하지만 그들이 가장 부러워하는 점은 모든 관계와의 단절이었다.

 

 

 회사 혹은 직장과의 단절.

 

 부모와의 단절.

 

 형제자매와의 단절.

 

 애초에 결혼을 하지 않아 생기지 않은 배우자와의 단절.

 

 자식과의 단절.

 

 친구와의 단절.

 

 

 그리고 현실과의 단절.

 

 

 이 모든 관계의 단절을 스트리머는 로망처럼 포장하여 판매하고 시청자는 산타에게서 선물을 받은 어린아이를 보는 어른처럼 부러워한다.

 

 기실 그 선물 안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은 뒤로하고 현실에는 산타 할아버지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홀로 사는 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가상 세계를 현실로 끌어들이며 잡고 있던 손을 너무 많이 놓아버린 것은 아닌가, 혹은 잡은 손을 단지 편리하다는 이유만으로 AI의 차가운 손으로 대체해 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메타월드의 상위 영상 리스트를 훑어보며 역시 나는 가상 세계보다는 현실 세계가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과 손을 마주 잡아 온기를 느낄 수 있고, 눈물을 흘릴 때는 어깨를 빌리고 빌려줄 수 있는.

 

 서로 ‘사람’이라는 걸 인식하기 때문에 감정이 상할 수도 있고 결국 상처받은 마음으로 관계가 단절될 수도 있지만 동시에 내가 웃으면 기계적으로 인식된 정보가 아닌 정말 내 감정을 이해해 마주 웃어주는 사람이 있는 현실 세계가 더 좋다고.

 

 

 그리고 이런 현실 세계를 사람들이 잊지 않아 주었으면 좋겠다.

 

 실종된 '정아시'님이 언제고 다시 돌아오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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