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용천에게 베아트리체를 맡기다.
상황이 갑자기 이상한 방향으로 급변했다.
베아트리체와 수진 누나는 의외로 담담했다.
나만 속에서 쿵쾅쿵쾅 탱크가 굴러갔다.
침착을 속으로 수십 번 외치며 저음으로 말을 깔았다.
- 조달호 교수 말은 겸임 면접이라고...
- 처음엔 그렇게 시작하려구 했었어, 근데 엄마 병이 빨리 진행돼, 널 급하게 부를 수밖에 없었어, 엄마는 니가 불의
의 사고로 죽은 아들 같다고 늘 말씀하셨고, 성제가 널 괴롭히고 못살게 군 것도 거기서 이유를 찾을 수 있었지.
누나가 말한 지금 이 말이 내가 그렇게 알고 싶어 했던, 성제가 날 괴롭힌 진짜 이유란 말인가, 아니야, 모르지, 아 혼란스러워... 베아트리체 아들의 불의의 사고? 어떤 사고지? 나랑 무슨 연관? 형광등이 깜박일 뿐, 벽창호인 내 머릿속에 그 짧은 순간 명확하게 이거다 짚이는 게 없었다.
- 그런가? 아닌데... 성제 천성이... 암튼 모르겠어, 큰어머님, 지금 저 잘살고 있으니 누나나 큰어머니께서 미안해하
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리고 왜, 왜? 저한테 두 분이 미안해 해야되죠? 그런 거 때문이면 전 여기 오지 않으렵니
다.
- 아냐, 우리도 사업이야, 자선 사업이 아니구 진짜 피 튀기는 사업이야, 교육사업, 뜻있고 낭만적인 거 같지? 천만
의 말씀이야...
수진 누나가 정색하며 내 말에 반론을 제기했다.
- 넌 충분한 자격이 있어.
베아트리체 말에는 나에 대한 무조건적 무한한 신뢰가 담겨 있었다.
대한민국 엄마와 같은 마음이랄까. 내 아들이 어때서 하는...
- 조달호 교수가 그러던데, 가야사에 관해서는 자기보다 낫다고...
- 내가? 무슨 소릴... 학교 취업률 올리려는 교수들의 얄팍한 술수야. 그리고 내 지
적 수준이 아직 전강을 맡을 정도로 깊지 않아, 습자지 두께 정도, 헤, 헤...
베아트리체는 미소를, 누나는 쿡하고 웃었다.
- 몽대야, 고맙다. 만나줘서...
나를 쳐다보고 천사의 미소를 지으며 베아트리체가 말했다.
- 엄마, 몽대가 그렇게 좋아? 얼굴에 웃음이 떠나지 않아.
- 그래, 이젠 웃으며 죽을 수 있어서 좋구나.
-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모든 수단과 방법을 써 봐야지요. 누나 병명이?...
- 췌장, 위, 자궁... 말기 암이야...
- 뭐? 그렇게 심해? 마음의 병이라며?
- 그게 진행돼서...
- 재단 산하에 병원도 있잖아?
- 엄마가 한사코 병원 가는 게 싫다고... 내가 무심했던 거지...
- 또 그런다, 내 병이 왜 니 잘못이야...
베아트리체가 자책하는 누나를 나무랐다.
내가 숙연해진 누나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 누나 화장실이?
- 저쪽으로 가서 꺾으면 바로 있어.
나는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화장실이 최고급 호텔처럼 꾸며져 있었다. 황금색을
메인 테마로 한 디자인이 세련되면서 현대적 감각이 돋보였다.
대형 거울 앞에서 심호흡을 길게 했다. 경건한 의식처럼 물을 틀어 얼굴을 씻고 손도 씻고 닦으며 거울을 봤다. 결의 찬 모습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허리춤에 찬 용천을 칼집에서 꺼내 들었다. 용천이 오색찬란한 빛을 발하며 화장실 안을 가득 채우더니 천년 잉어가 돼 왼손에 감겨 팔에 서서히 녹아들었다. 거울을 보고 혼자 뇌까렸다.
- 몽대야, 한번 해 보는 거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고, 밑져야 본전이고, 진인사대천
명이고, 올림포스 신전에 사는 베아트리체를, 니가 그렇게 동경했던 여인상(女人像)을 몽대 니가 살리는 거야, 하
나님, 나의 간절한 기도를 받아주십시오, 전능하신 하나님 내게 용기를 주십시오,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
도를 드립니다, 아멘~
나는 일생일대의 대수술을 앞둔 의사처럼 경건한 마음가짐으로 화장실에서 나와 베이트리체가 누운 침실로 갔다.
- 누나, 우리 할 수 있는 거 다 해 보자.
- 무슨 말이니?
누나가 뜬금없이 무슨 말이냐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사술(邪術) 같은 건가? 하는 의심의 눈빛도 살짝 비췄다.
나는 설명보다 행동이다 싶어 덥썩 누나를 안았다. 누나가 화들짝 놀라 또 윽, 했다.
나는 용천이 녹아든 왼손을 부드럽게 누나 등을 어루만졌다.
용천의 강렬한 빛이 누나 몸의 미세한 신경을 파고들었다. 누나는 도저히 표현 불가능한 뜨겁고 엑스터시 한 감정을 느꼈다. 온몸에 퍼지는 전율은 묘한 황홀경까지 동반했다.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에로틱함하고는 거리가 먼 뭉클하고 상쾌함 같은 거였다.
누나가 나를 안고 허물어졌다. 누나를 더 꼭 껴안았다.
수밀도 젖가슴 사이에서 나는 쿵쾅대는 심장 소리가 몸에 느껴질 정도로 컸다.
누나는 안간힘으로 겨우 버텼다. 냉철한 이성이 촛농처럼 녹아내렸다. 이럴 땐 재계(財界)나 학계(學界)나 자주 듣던 냉철한 이성의 소유자 장수진... 은 의미가 없었다. 몽대에게 나를 맡기는 게 운명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꼼짝 못 했다.
- 누난, 날 믿어야 돼, 그래야 엄마를 살릴 수 있어, 알겠지?
귀에 대고 속삭이듯 말했다. 그러나 내 말에 단호함이 배여 있었다.
누나는 자꾸 내 말끝에 묻어 있는 입김이 감미롭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런 묘한 기분에 무엇 때문에 부정하고 뭘 계산하고 뭘 신중해져야 하는지... 일종의 무장해제였다.
- 응, 이젠 믿을 것 같아...
- 끝나고 차차 설명해 줄게.
- 사상의학(四象醫學) 같은 거니?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베이트리체가 평온한 표정으로 물었다.
안았던 누나를 풀어줬다. 누나가 휘청거렸다.
- 그 비슷한 겁니다.
- 이제마?
누나가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미소를 지으며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이제마를 알고 끄덕였던 게 아니라 빨리 그렇게 매조지고 싶었다. 베아트리체나 수진 누나에게
대사(大事)를 앞두고 굳이 불안감을 조성할 필요가 없었다.
- 소독용 알콜 있어?
- 소독용 에탄올? 있지...
- 알콜 솜도?
- 응, 항상 비치해 뒀어.
- 그럼 누나는 알콜이 든 세숫대야와 알콜 솜 그리고 물티슈 좀 가져다줘.
- 엄마...
수진 누나가 근심 어린 표정으로 엄마가 마지막으로 결정하면 거기에 따르겠다는
듯이 베아트리체를 쳐다봤다.
- 괜찮아, 내가 아들을 믿어야지 누구를 믿니?
베아트리체 미소가 포근했다.
수진 누나가 베아트리체의 단호한 결심을 보자 홀가분 마음으로 내가 필요하다는 것을 가지고 왔다.
- 누나는 보지 마.
- 왜?
- 내가 민망해서 그래.
- 몽대야 있으면 안 돼?, 제발...
누나가 투정 겸 아양을 떨었다. 일말의 불안감일 거다.
나는 안된다는 말 대신 고개를 저었다.
그 투정과 아양에는 베아트리체에 대한 걱정이 더 앞서겠지, 십몇 년 만에 만난 인간이 한다는 짓인데 의구심이 드는 건 당연한 거겠지. 놀라만 한 의술로 세상을 놀라게 한 인물도 아니고, 증명해 보인 것을 내 눈으로 직접 본 것도 아니고... 누나 감정이 그랬다.
내가 문밖으로 누나를 배웅하며 용천이 녹아든 손으로 누나 등을 쓰다듬었다.
누나가 짜릿함에 돌아서며 내 눈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때서야 누나의 눈에는 나에 대한 무한한 신뢰의 눈빛과 베아트리체의 불치병에 대한 치유(治癒)의 간절함이 배여 있었다.
- 잘 부탁해, 넌 한 번도 날 실망시킨 적이 없었어...
누나가 내 손을 잡고 말했다. 짧은 말이지만 말에 강렬하면서도 절실함이 묻어 있었다. 이젠 실패해도 실망하지 않겠다고 들렸다.
- 믿어 줘서 고마워...
- 내가 고맙지, 씨... 보고 싶은데....
누나는 투덜대며 나갔다. 만일 연인 사이라면 누나가 내 엉덩이를 토닥였거나 아니면 내가 누나 엉덩이를 토닥였을 텐데라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어린 시절의 소구인가? 기시감인가?
문을 잠그고 베아트리체 곁으로 다가갔다.
수건으로 베아트리체 눈을 가렸다.
- 아들을 믿죠?
- 그럼.
- 지금부터는 부끄러운 게 아닙니다, 아들한테 몸을 맡겨주십시오. 젖먹이 아들이라 생각하십시오. 젖먹이 아들은
아들일 뿐 남자가 아닙니다. 엄마와 동심일체(同心一體) 한 몸이라 여겨서야, 되십니다.
베아트리체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베아트리체의 옷을 하나씩 벗겼다. 옷을 하나씩 벗길 때마다 베아트리체의 자신감이랄까 떳떳함이랄까 그 당당함은 하나씩 무너졌고 여자이기에 가지는 본능적 수치심만 감출 수 없어 온몸이 미세하게 떨었다. 주먹을 꽉 쥔 두 손이 그걸 말해 주었다. 전라(全裸)의 베아트리체 몸은 탄탄했고 극세사처럼 부드러웠고 터질 듯 무르녹았다. 처녀 몸이랑 다를 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