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장. 태양계, 꽃으로 지다 (3)
#14. 앞 장면과 같은 시각. 태양계 내 타이탄 상공의 우주. 해적선 신천지호의 선장실
적이 다가오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지 오래였지만 김진욱090의 시선은 전망 스크린 속의 타이탄에 고정되어 있었다. 간디068을 비롯한 간부 해적들도 김진욱090의 시선을 따라 타이탄의 경치를 지켜보았다. 모두들 잔뜩 굳은 표정이었는데, 이번의 일전이야말로 모든 것을 종결짓는 최후의 전쟁이 될 것이라고 의견을 모은 탓이었다.
#15. 앞 장면과 같은 시각. 타이탄 지하 갱내의 재생인간 배양실
타이탄은 인공으로 만들어진 푸른 별이었다. 메탄이 대기의 주성분이었던 불모의 별 타이탄을 장미가 꽃 필 수 있도록 산소가 충만한 별로 만든 주역은 장미장원의 여인들이었다. 꽃을 가꾸고 술을 빚어 생업으로 삼으며 700년의 세월을 기다림 속에서 살아왔을 여인들…… 김진욱090은 온갖 회한이 요동치고 있음을 느꼈다.
“당신네 남자들은 일을 벌여 놓고 떠나가 버리면 그만이지만 우리네 여인들은 탈주의 길이 없는 기다림의 울타리 속에서 그리움의 고통으로 시들어 간답니다. 우리가 꽃을 피우고 술을 빚어, 주점의 문을 활짝 열어 놓았던 이유를 설마 모르십니까? 새로운 품종의 장미를 꽃피울 때마다 우리가 기뻐했던 이유는, 먼 훗날 만났을 때 당신을 사랑했노라고 자랑할 수 있는 증거를 또 하나 쌓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엘리자벳033이 알렉산더093에게 안기며 푸념처럼 말했다. 가엾게도 엘리자벳032는 한 차례 전신이 불타는 죽음을 겪은 탓에 본래의 기억을 잃고 인조 기억을 얻은 복제였다지. 복제가 그러할진대 실제의 기억을 전수 받으며 700년을 이어온 고통은 어떠했을까. 더구나 저 흑장미064로 말하면…… 김진욱090은 눈을 지그시 감아 감정을 달랬다.
90세대, 700년. 우주가 다차원물리학에 의해 시공을 초월한 초광속의 시대로 접어들게 만든 공로 못지않게 죄악이 많았던 세월. 영원을 찾아도 못 찾을 것 같던 그 옛날의 사랑은 진작 원점으로 돌아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을……
우리가 진정 사랑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사랑을 빙자한 고통을 사랑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여인의 미모나 육체가 아닌 영혼을 찾아 헤맸노라고 강변해 보아도 기억되는 건 외모였고 그리운 것은 따뜻한 육체였다. 실체를 알 길 없는 영혼을 그리움의 주체로 삼을 양이면 그 영혼을 나누어 받은 저 여인들을 애써 외면한 것부터가 거짓 아니었던가. 더구나 흑장미로 말하면……
한 몸에 두 지성을 갖게 된 여성의 고통은 또 어떻게 보상할 것인가. 그 중의 한 지성이 개체의 영혼으로 인정되지 못하여 700년의 세월 동안 그리움의 고통에 떨었다면…… 죄를 지었구나. 죄를 지었구나.
그렇다고는 해도 어느 시공 속에 있는 것일까. 공간의 끝까지 찾아 헤맸어도 얻어진 것은 우주의 불가사의에 대한 두려움뿐이었다. 시작과 끝이 맞물려 영원을 돌고 있는 저 혼돈의 시공 속에서 인간의 집착이란 얼마나 하찮은 것이며, 그 집착에 연하여 찾고자 하는 영혼은 우주의 소재 중 무엇이 되기에 이렇게 한 조각을 전체인 양 의식하여 애태우고 있는가.
찾는다는 것, 무한한 우주 속에서, 실체가 없는 영혼을……. 꿈을 꾸었는가. 불가능을 꿈으로 갖고 살아온 과거를 깨달은 초라함이여.
삶…… 그것은 영겁의 시간 속을 찰나의 빛줄기가 스쳐 지나간 데 지나지 못할진대, 그 초라한 생애 속에서 우주의 전체를 밝히려는 양 집착해 온 사랑이란 도대체 무엇이며, 정체조차 밝히지 못한 사랑을 쫓아 온갖 추한 일을 거듭해 온 삶이란 또 얼마나 허황한 꿈이었던가.
“대장. 적이 가까워 오고 있네.”
간디068의 소리가 김진욱090의 상념을 깨웠다. 이 친구, 간디068.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안개 같은 사람. 700년 전의 시작부터 곁에 있어 주었지만 무엇을 기대하여 고난을 자청했는지 도무지 그 속마음을 짐작할 수가 없었다.
나와 오신, 코넬, 알렉산더에게는 사랑이라는 집착의 대상이 있었지만, 이 친구는 우주 안에 추구할 그 무엇도 갖지 않았는데 700년을 하루처럼 곁에 있어 주었다. 지금도 저렇게 안쓰러워하고 있고. 그렇다면 역시 이 친구의 집착의 대상은 나였던가. 내 허황한 사랑에 대한 안타까움?
아닐 것이다. 그때의 사건에서 이 친구의 역할은 나 이상으로 큰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이 친구도?
#16. 김진욱의 회상. 우주력 원년 1년 전. 화성. 화성생명법인의 인간재생 수술실
300년 전에 죽은 청황실의 공주로 21세기 말의 초과학시대에 재생되었던 예진과, 사이보그 여성의 딸로 불완전 생명이었던 유사인간의 재생 흑장미가, 나란히 수술대 위에 올라 두뇌가 적출되고 있었다. 화성생명법인의 총수 ‘교수’와 인간재생학 전문가 간디가 레이저 메스를 조종하여 두 여인의 생명을 조롱하고 있었고, 김진욱과 류우가 걱정스레 지켜보고 있었다.
“약속하겠네! 내가 사랑하는 여인 흑장미의 복제피로현상으로 인한 죽음을 예진 이모의 유전자를 빌어 극복하는데 성공하면, 반드시 우주로 쏘아올린 이모님의 유해를 찾아내어 본래의 예진 이모와 당신을 짝지어 줄 것을!”
류우가 김진욱에게 다짐의 말을 하였다. 수술도를 잡고 있던 간디가 고개를 들어 두 친구를 돌아보며 눈빛을 흐렸다.
#17. 현실. #15의 연속. 타이탄 지하 갱내의 재생인간 배양실
“적이 태양계 안으로 진입했습니다!”
오퍼레이터의 보고였다. 김진욱090은 간디068의 기형적인 얼굴을 힐끗 본 후 지휘봉을 잡았다. 참으로 그렇다면 이 친구야말로 우리 중에 가장 고독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김진욱090은 타이탄 지하 갱내의 재생인간 배양실과 해적선 신천지호 모두에 한 지성으로 임해 전체의 상황을 조망하고 있었다. 은하연방 우주군 연합함대의 선두 함정이 해적선 신천지호를 향해 포문을 열었고, 신천지호의 화포들도 반격을 시작했으므로 태양계 안팎 우주 공간은 포화로 가득했다.
#18. 앞 장면의 연속. 태양계. 토성계가 보이는 우주
우주 공간을 가득 메우고 날아오던 해적선 신천지호 측 단승 공격기들은 은하연방 우주군 연합함대의 전면에서 갑자기 이해할 수 없는 행태를 보였다. 신천지호 측 단승 공격기들은 일제히 공간에 멈추어 탑승했던 해적들을 공간에 토해 내고 있었다.
연합함대의 지휘관인 류우459는 공격을 서두르는 부하 참모들을 제지했다. 놈들! 무슨 잔꾀를 부리나 두고 보자! 그는 그 만큼 자신의 지휘 하에 있는 함대의 전투력에 자신을 갖고 있었다. 놈들이 소문 높은 신천지호의 해적들이라 한들 단기 필마로 대군을 당하랴. 우리의 병력은 놈들의 일 백 곱절 이상이 아닌가.
단승 공격기에서 내린 해적들은 집단을 이루기 시작했다. 타이탄에 상륙했던 은하연방 우주군 함대가 장기로 삼던 로마군단이 우주공간에 진용을 드러내고 있었다.
우스운 짓을 하는 놈들이군. 우주공간에서 보병의 전술 중 가장 완속(緩速) 공격인 로마군단의 전진 대형을 취하다니. 연합함대의 작전담당 참모들은 코웃음을 쳤다.
참모들의 대화를 듣는 류우459 역시 같은 기분이었다. 놈들은 우주 공간의 무중력 무산소의 환경을 견딜 수 있는 새로운 몸으로 개조를 한 모양이다. 자칭 우주 제일의 인간개조 전문가라는 간디068의 솜씨이겠지만 그게 어떻다는 말인가. 우주 공간은 무한히 넓고 로마 군단의 전진 속도는 한정돼 있다. ‘원인이 발생하기 전에 봉쇄’하는 다차원 물리학을 응용한 초광속 공격을 저지하기 위해 ‘저속일망정 원인을 반드시 발생시키기 위해’ 고안된 것이 로마 군단의 전법 아니던가.
타이탄이 한 위성으로 지역적인 한계를 지닌 탓에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는 적이 스스로 대적을 해주었으므로 성공할 수 있는 전법이었을 뿐 후퇴의 공간이 무한하게 보장되어 있는 우주 공간에서는 취할 만한 전법이 못된다. 와라. 적당한 속도로 후퇴하여 아군 함대에 상륙할 기회를 주지 않으며 반양자포를 퍼부어 주겠다……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류우459는 홀연 떠오르는 어떤 불길한 생각에 등골이 오싹하는 공포를 느꼈다.
“후퇴하라! 전 함대 전속으로 후퇴하라!”
류우459의 절규와 같은 명령이 떨어지는 순간 비극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해적 집단의 로마 군단은 믿을 수 없이 빠른 속도로 연방 우주군 연합함대의 함정들을 습격했다. 로마 군단의 초광속 전진…… 류우459는 신음했다. 놈들! 엄청난 훈련을 쌓았겠군! 다차원 물리학의 초광속 세계에서 로마군단의 진용을 잃지 않고 진격한다는 것은.
일방적인 도살이었다. 은하연방 연합함대의 공격은 ‘원인이 발생하기 전에 봉쇄’하는 해적들의 다차원 물리학을 응용한 초광속 이동으로 인해 무용화된 반면, ‘원인을 반드시 발생시키는’ 로마 군단의 저속 공격 전법을 고속화시킨 해적들의 공세는 목표로 한 함정이 침몰의 비명을 올릴 때까지 완벽하게 수행되었다.
서둘러 도망친 후미의 함정 몇 척을 건졌을 뿐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은 류우459는 급히 달려온 프록시마 주둔 함대의 지원에 힘입어 반격을 시도했으나 그 또한 무용한 노력이었다. 태양계의 이웃 항성인 프록시마에 주둔한 함대는 인류의 고향인 태양계와 우주 유일의 비사법지역인 타이탄의 동정을 감시하기 위해 편성된 일급 함대였지만 해적들의 적수는 되지 못했다. 해적들의 초광속 로마 군단의 공세는 프록시마 함대가 공세의 진용을 펼치기도 전에 ‘원인이 발생하기 전에 봉쇄를 해내는’, 상식 이전의 신종 전투기술을 선보이고 있었다.
전망 스크린을 통해 휘하의 함대가 차례로 파괴되는 양을 지켜보는 류우459의 눈 속에서 분노의 불꽃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이놈들! 이놈들! 원자 파괴로 인해 태초의 빅뱅을 차례로 겪고 있는 은하연방 우주군 함정들의 뒤편 우주 공간에 김진욱090과 흑장미064의 영상이 나란히 나타난 것은 그때였다. 간디068을 비롯한 신천지호 측 해적들과 샤넬085를 비롯한 ‘언제나 장미가 피어 있는 곳’의 여인들이 호위하듯 뒤따르고 있었다.
영상 속의 사람들은 모두 전라의 모습이었다. 특히 김진욱090과 흑장미064는 가장 원초적인 사랑을 속삭이고 있는 한 쌍의 아담과 이브였다. 류우459의 분노가 폭발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전 함대 반양자포 최대 가동! 일제 발사!”
류우459는 자신의 명령이 빚을 결과를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휘하 함대는 아직 항성계 하나 만큼의 반물질 에너지를 보유하고 있을 터였다. 함대의 전력을 다한 반양자포의 공세…… 반물질과 상물질의 접촉은…… 류우459는 낮게 신음했다.
끝이다. 이걸로 모두. 나 역시…… 그의 귀에 홀연 김진욱090의 소리가 들려 왔다.
“잘 했네. 우리도 우리가 너무 많은 것을 알려고 하지 않았나 걱정하고 있었다네.”
그리고 또 하나의 소리가 있었다.
“당신의 분신을 만들었지요. 내게 인연을 남긴 빌미로……”
류우459의 눈앞에 자신을 닮았지만 지성이 공유되지 않는 자신이 서 있었다. 그는 전생테가 460인 새로운 류우로 타이탄의 장미장원이 만들어 낸 또 하나의 류우였다.
“무엇을 만들어 낸 거지?”
우주 안의 모든 류우459의 지성이 일제히 공통된 의문 속에 들었다. 전체생명의 각 분자인 그들은 자신 안의 공동을 발견한 듯 갈증 속에 답변을 기다렸다. 그리고 답변이 돌아오기 전에 종말을 맞고 있었다.
태양계가 폭발하고 있었다. 은하연방 우주군 함대가 발사한 반양자포의 반물질 에너지는 태양을 비롯한 태양계 내 행성과 위성들의 상물질과 반응하여 새로운 초항성계를 만들어 낸 후 우주 밖으로 사라졌다.
#19. 앞 장면의 연속. 수선013과 론775의 시각에서 본 어느 우주
수선013은 화염지옥으로 변해버린 태양계를 보며 악몽 속에 홀로 맑음을 유지하고 있는 자신의 정신을 저주했다. 이게 아냐. 나는 이런 현실을 원한 적 없어. 인류의 고향 지구별을 비롯한 태양계가 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지켜볼 뿐…… 그게 종말의 현장에 초대된 이유였다. 다만 신과 가까운 곳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수선013은 깊이 침음했다.
수선013은 자신이 보고 있는 경치가 꿈이기를 바랐다. 한 바탕의 악몽이라면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것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이 될 것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역시…… 그런 그에게 여러 소리가 단편적으로 들리고 있었다.
-무얼 만들어낸 거지? 나를 닮았지만 내가 아닌 이것은?
-당신이 잃어버린 당신의 절대선. 아직 증오에 물들기 전에 당신의 양심을 지탱해 주던……
-그런……
-잊으셨나요? 타이탄의 장미장원은 그 옛날 화성생명법인의 적통을 이은 곳임을!
#20. 앞 장면의 연속. 시간이 흐른 후의 어느 우주
-결국, 종말의 무대를 만든 것은 타이탄의 여인들이었던가요?
-그들 모두 용인했겠지. 그리움을 끝내려고…… 아름다운 결말을 바랐을 뿐 저런 형태의 종말을 원했던 것은 아니었겠지만…… 결국 종말을 부르게 되고 말았군.
-…….
-여인들은 말일세. 사랑하는 사람의 자식을 낳고 싶어 한다네. 설령 복제인간일지라도……
-…….
-떠나고 싶었던 거야. 인간으로서 더 이룰 무엇을 찾을 수 없는 혼돈의 우주에서. 다만 증인이 필요했는데, 당신이 그 역할을 하므로 또한 신의 뜻이었음이 증명되었어.
-…….
-신은 어느 곳에도 계시네. 바로 우주이지. 그리고 우리는 우주의 한 조각일세. 조각이 전체이고 전체가 조각인 곳이 우주이니 우리가 바로 우주라는 결론…… 자격이 충분하다고 생각되지 않나?
-…….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말게. 신의 안배 안에서, 신의 뜻에 의한 변화일 뿐이었네.
-저는 다시는, 신을 말씀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신의 행사가 이토록 어려우니……
#21. 그리고 많은 시간이 흐른 후의 태양계가 멸망한 자취 위의 우주. 어느 물리학자의 서신
-몇 번을 계산해 보아도 수치가 맞지 않았어. ‘태양계 최후의 전쟁’의 결과물로 나타난 초신성은 과거의 태양을 비롯한 태양계 내의 모든 천체들을 망라하여 탄생한 에너지의 덩어리임이 분명한데, 대폭발로 인해 생긴 에너지에서 은하우주군 함대가 발사한 반양자포의 반물질과 상쇄되어 달아난 값을 뺀 나머지가 초신성의 현재 에너지가 되어야 하는 게 정답 아닐까 하고 계산했을 때, 딱 태양계 내 유인 행성들이었던 지구와 화성, 타이탄만큼이 모자라더란 말이야.
이해하기 힘든 것은 상부의 태도일세. 내 보고서를 아예 무시하는 거야. 내가 제시한 수치는 꼼꼼히 점검하면서도 그 결과는 인정하지 않는 건 무슨 까닭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