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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카
작가 : JakeCello
작품등록일 : 2021.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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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2-01-02     조회 : 229     추천 : 0     분량 : 4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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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장장이 마르카와 더 어린 소년이 떠나는 연유는 이러하다. 아마미크 무리가 노을 무리를 공격하는데 실패하고, 교수형에 다시 처해질 뻔한 마르카가 사면된 지 얼마 안 지나서 일이다.

 마을이 어느 정도 제 모습을 다시 갖출 즘 마르카가 가장 나이 많은 원로 케루비니를 찾아갔다. 노인은 저물녘 방문한 젊은이에게 차를 권했다. 추수하고 흙바닥에 떨어져 남은 찻잎 부스러기를 모아 우린 노을차였다. 뿌리는 같으나 맛도 품질도 딴판이어서 냄새나는 물이나 다름없었다. 마르카는 감사하다고 말하고 예의 갖춰 찻잔을 들었다.

 “그래, 그 아이는 잘 지내는가?”

 “조금은 적응한 모양입니다. 아직 입을 열면 듣기에 고통스러운 소리를 내지만요. 어느 무리 쪽 말인지 도통 모르겠네요.”

 전투가 끝나고 원로들은 발미를 죽인 게 사실은 아마미크 일당이었으리라고 판결을 다시 내렸다. 케루비니가 숲에서 아마미크의 부하를 보았다고 증언했다. 마을 사람들 가운데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들은 납득이 가지 않는 점이 있더라도 걸고 넘어가지 않았다. 마르카를 의심하고 깎아내리던 이웃들의 태도가 바뀌었다. 당사자는 그들을 비난하지 않았다. 부침 많은 무리가 나날을 살아가는 방법이 달리 있을까.

 “어떤 사연 때문에 목소리를 잃어버린 건지도 모르네. 그래도 자네 어머니께서 잘 귀기울여주는 것 같구먼. 레아 앞에선 그 애의 소름끼치는 비명이 악다구니 정도로 진정되는 듯하니.”

 마르카의 표정에 수심이 깃들였다. 어머니는 이제 칼을 잡지 않기로 맹세했다. 사람들은 레아가 새로이 딸을 얻어 사는 재미를 찾아 그렇다고 웃었다.

 “저, 한 가지 청해드릴 게 있습니다.”

 케루비니는 조용히 마르카를 보았다.

 “수도에 다녀오려고요. 그동안 어머니와 제……동생을 보살펴주십시오.”

 “무슨 연고로 다녀오려나?”

 “산책삼아 세상구경 좀 할까합니다.”

 노인이 슬쩍 웃다가 엄숙히 말했다.

 “로세트까지는 구경하기에는 먼 길이네. 마을에는 자네를 위해 여정을 함께 떠나기에 적합한 노새도 없네. 유감스럽게도 이를 먼저 분명히 해두지 않으면 안 되네.”

 “이해합니다. 일정이 급하지 않으니 걸어가겠습니다.”

 케루비니가 눈을 감고 뭔가 생각한 뒤 일어나 집 안 한구석에 놓인 서랍장으로 갔다. 서랍에서 봉투를 하나 꺼내 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색 바랜 종이봉투를 열어 편지 한 장을 꺼내 마르카에게 보여주었다.

 “행여 구경만 할 게 아니라면 내 딸아이를 찾아가게. 내 손아래에서 딸아이는 에르마로 불리었네.”

 “따님이 계실 줄 몰랐습니다.”

 “결혼하고 쭉 거기서 살고 있지. 다도원에서 차를 달이고 마시는 방식을 가르치고 있네. 일 년에 한 번 찻잎을 거두러 마을에 오는데 그 때 겨우 짬을 내어 만난다네. 일이 너무 바쁜 모양이야. 참, 결혼 전만 해도 자네 어머니 레아와 동무였어.”

 그는 마르카에게 봉투를 건넸다. 마르카가 편지를 펼쳐 보는 동안 노인이 말했다.

 “이건 간혹 무리에서 수도로 가는 이를 위해 마련한 서신으로, 발미가 수도로 갈 때도 같은 걸 전했네.”

 마르카는 편지를 실수 없이 품에 넣었다.

 “실은, 수도의 주인에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요청을 드리러 갈까 해도 좋을까요.”

 “요청이라? 무엇을?”

 “……앞으로 누주의 노을찻잎은 원하는 양을 원하는 값에 팔겠다고요.”

 노인은 눈을 감고 숨을 고르며 깊이 셈을 구해보았다.

 언젠가 누군가는 나서서 주장해야 할 권리인지도 모른다. 허나 아무도 나서지 못 했고, 용기를 드러낸다 해서 든든한 지원을 받을 가능성도 희박했다. 모두 반대할 테고, 지금 노인 역시 잘못될 경우를 대비한 변명부터 세우고 있지 않나. 햇빛 받은 먼지가 집 안에 반짝였다. 노인이 눈을 뜨고 잠잠히 기다리던 청년에게 힘겹게 입을 열었다.

 “어머니께서는 아시는가?”

 “말씀은 드렸습니다. 대답은 아직 못 얻었으나.”

 “그래, 언제 출발하려고?”

 “그게…… 누주가 절 막지 않는다면 내일 새벽녘에 떠날 계획입니다.”

 케루비니가 잔을 다 비우고 말했다.

 “성공하면 누주의 공이 되고 수틀리면 자네 혼자 책임을 덮어씌워야 할지도 모르네. 그래도 괜찮은가?”

 “상관없습니다. 벌써 제 목에 걸어본 올가미만 두 번입니다. 꼼짝없이 숨이 멎는 줄 알았고, 운은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길도 마찬가지로 기쁨이 기다리라 여기지 않고요. 그저 저 혼자 판단했습니다.”

 노인이 청년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아주 오래전에도 이런 철부지가 조상 가운데 있었다지.

 “레아와 바르바라와 그들의 재산을 잘 보살피겠네. 마르카가 아끼는 만큼 잘 보살피겠네. 그리고 내가 훌륭한 길라잡이는 아니네만, 가모네를 거쳐 가는 길이 용이할 걸세. 누주와 사이 나쁘지 않은 마을이니.”

 한 소년이 건넛방에서 나왔다. 기척에 노인이 눈을 떴다. 어두운 금발에 감람색 눈동자. 예전에 아마미크라는 적들이 쳐들어왔을 때 원로회관에 들어와 침략을 알리던 소년, 로비스였다.

 “저도 갈래요. 이번에 엄마 못 봤잖아요.”

 케루비니는 무릎에 손을 놓고 자신을 올려다보는 손자를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마을에 난리가 나는 바람에 수도에서 최소한의 인원만 찻잎을 가지러 왔다. 그 인원에 에르마는 없었다. 머리를 한 번 쓰다듬고 희미하게 고개를 저었다.

 “에르마가 아들에게 기대하는 업은 여기 있단다.”

 벌써 수백 번이고 졸랐던 로비스는 이번에도 통하지 않으리라 느끼고 울면서 밖으로 뛰쳐나갔다. 케루비니와 마르카가 사라지는 아이를 지켜보았다. 청년이 다시 얘기를 이었다.

 “누가 묻거든 누주의 대장장이 마르카는 일신상의 흥을 돋우려고 수도에 가는 것으로 전해주세요.”

 노인이 청년에게 악수를 청했다.

 “안녕히 잘 다녀오길 바라네. 그 때까지 내 유일한 소망은 이 하나 뿐이야.”

 

 *

 

 마을을 나서기 직전, 마르카는 한쪽 어깨에 가죽가방을 맨 로비스를 만났다.

 “같이 가.”

 “장로가 허락했어?”

 “알 바 아냐. 난 엄마만 만나면 돼.”

 “여기 있어라. 난 너 못 챙겨준다.”

 “내가 마르카 챙길게. 가면서 수도 말도 가르쳐주고.”

 “로세트 말이랑 우리말이 뭐가 다르다고?”

 “것 봐.”

 로비스가 가방에서 노끈으로 반듯하게 묶은 종이뭉치를 꺼내 보였다.

 “나 엄마한테 편지로 로세트 말 배우거든? 가면서 가르쳐줄게. 내가 챙겨주는 거 맞지? 아, 빨리! 할아버지 깨기 전에!”

 로비스가 앞장서서 마을 밖으로 나서려 하자 마르카가 그의 목덜미를 붙잡아 당겼다.

 “그만하고 가라니까!”

 힘을 거의 들이지 않았더라도 대장장이의 팔이 행한 일이었다. 아이는 뒤로 고꾸라지면서 공중에 흩어지는 편지를 망연히 보았다. 가방이 바닥에 떨어지며 둔탁한 충격음을 냈다. 그제야 청년은 자기가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

 “아, 미안, 미안하다. 다치지 않았어?”

 로비스는 마르카가 내민 손을 뿌리치고 스스로 일어나 몸을 털었다. 그리고 어머니 에르마가 보내온 편지를 한 장 한 장 찾아 주웠다. 마르카도 같이 줍느라 오래 걸리지 않았다. 편지가 빠짐없이 모여 있나 확인한 소년이 울음을 참으며 울먹이는 투로 말했다.

 “아무도 나랑 안 가. 혼자 가긴 무섭고, 지금 아니면 언제 갈 수 있을지 몰라서……. 마침 마르카는 믿을 수 있으니까.”

 곧 아침이 오고 날이 더워질 터였다. 겨울이 가장 늦게 찾는 누주이지만 이른 새벽은 쌀쌀하고 한낮은 더운 곳이다. 동트기 직전에 떠나야 날씨를 덜 타고 다음 마을에 도착할 터였다. 마르카는 로비스가 마지막에 흘린 한 마디에 잠깐 망설였다. 그는 누주에 쳐들어왔던 도적은 물론 괴물과 악령을 상대해야 한다고 소년을 겁주었다. 소년이 잔뜩 인상을 쓰고는 하나도 겁 안 난다고 소리쳤다. 그리고 가방에서 묵직한 쇳덩이를 힘겹게 꺼냈다. 마르카가 대장간에 두고 온 망치였다.

 “어쩐지 가방에서 무거운 소리가 나더라니.”

 대장장이는 자기가 떠나 있는 동안 주민들이 편하게 이용하도록 대장간을 열어둔 걸 후회했다.

 “무기 삼아 갖고 왔어. 이걸로 다 죽이면 돼!”

 로비스가 팔을 부들거리며 망치를 휘두르는 모양새가 위태로웠다. 마르카가 피하지 않았다면 망치머리에 무릎이 깨질 뻔했다. 이러다 소년 자신이 다칠 수 있었다. 마르카가 틈을 노려 서툰 망치꾼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는 갑자기 한 가지 꾀를 떠올렸다. 망치 무게 때문에 로비스가 쉽게 따라붙지 못 하리라 생각하고 재빨리 자리를 벗어났다. 마르카는 허둥지둥 마을을 나와 몇 번이고 로비스를 따돌려 봤지만, 무거운 망치를 들고도 끈질기게 따라붙는 소년 때문에 얼마 못가 지치고 말았다. 돌아가기도 어려운 거리에 이르러, 마르카는 허리춤에서 단검 한 자루를 풀어 로비스에게 주었다.

 “가벼운 걸 지녀. 그래야 안 뒤처지지.”

 로비스가 가방에서 망치를 꺼내 단검과 맞바꾸었다. 그들은 더 이상 쫓고 쫓기거나 하지 않았다.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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