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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카
작가 : JakeCello
작품등록일 : 2021.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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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무릎과 손
작성일 : 22-01-06     조회 : 200     추천 : 0     분량 : 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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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래 바닥에 엎드린 남자의 목덜미에 희고 차가운 감촉이 떨어졌다.

 그는 이마에 모래가 닿은 그대로, 고요하게 숨을 고르며 손마디를 움직였다. 민들레 홀씨만한 눈송이가 손톱에 내려앉았다. 결정체는 금세 녹아버렸다. 라이너는 고개를 들어 눈 내리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첫눈은 머잖아 오랜 겨울을 견뎌야 한다는 신호였으나 입술에 닿은 그 물기는 달았다.

 혀가 잘리고 한쪽 다리를 저는 농담꾼이 무릎을 꿇고 손가락으로 모래에 한 자, 한 자 글씨를 새겼다. 문장이 아닌 글자로, 옆으로 늘이지 않고 같은 자리에 겹쳐서. 근래 겪은 일을 그간 해온 소박한 말 대신 다른 방식으로 풀어야 했다.

 누군가 이건 시이자 흐트러지는 모래 속으로 몸을 숨기는 계시로 여기리라. 한편으로 쓰는 이의 눈에는 모래에 잠시 남기는 짧고 가느다란 줄에 불과했다. 눈 속에 숨은 언 길처럼. 그의 손가락이 마른 모래 위에 남긴 흔적에 누군가 운율을 덮는다면 노래 가사가 될지 누가 알겠느냐마는.

 마지막 글자를 다 쓴 라이너는 무릎을 털고 일어나 마을 입구로 몸을 돌렸다.

 작고 큰 두 실루엣이 눈에 띄었다. 라이너는 그곳에 시선을 두고 윤곽이 뚜렷해지기를 기다렸다. 한참 전 마을을 떠난 대장장이의 어머니 레아와 원래 이름은 알 수 없으나 지금은 바르바라라 불리는 소녀였다.

 그들은 마르카가 돌아오기만을 바라며 매일같이 마을 앞까지 마중을 나왔다. 그러던 참에 라이너를 발견했다. 레아와 바르바라는 마르카, 또는 마르카의 소식을 전하는 외지인이 아닐까 싶어 마을 밖으로 나왔다. 하지만 대상이 시야에 뚜렷하게 들어오자 실망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바르바라는 익숙한 냄새라며 레아더러 한 번 누군지 살펴보자고 우겼다.

 소녀는 레아의 손을 붙잡고 꼭 붙어 다녔다. 레아는 소녀의 작은 보폭에 맞춰 조금씩 걸음을 옮겼다. 그들은 목소리가 닿을 만큼 거리가 좁혀지기 전까지 라이너 쪽으로 말없이 다가왔다. 바르바라가 손가락으로 무릎 꿇은 남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누군가는 소녀가 악몽에서 깨기 위해 내지르는 비명 같은 소리를 내는 걸로 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라이너는 바르바라가 말하는 소리를 똑똑히 기억했다.

 소녀가 뽐내듯이 이렇게 말했다.

 “내가 말했지? 살아 있잖아.”

 레아가 고개를 끄덕이고 라이너에게 말했다.

 “이 아이는 당신이 누군지 기억해. 나도 알겠어. 그쪽을 대면한 적은 없으나 어떤 사람인지 알겠다는 뜻이야.”

 그녀는 실제로 아마미크 무리를 가까이 본 적은 없지만 그들이 쏜 화살이 자기 옆을 비껴나간 기억이 있다. 절름발이는 레아가 자신의 다리를 무심한 분노가 느껴지는 눈길로 내려 보는 걸 알았다.

 “무릎을 꿇더군. 우리를 공격했던 적들을 위해 기도했나?”

 라이너는 눈동자를 돌리다가 무심코 소녀의 팔에 난 상처자국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다시 레아의 눈을 마주했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모래에 한 글자 한 글자 썼고, 두 사람은 가만히 기다렸다.

 “저들이 다시 깨어나지 않기를 빌었지.”

 레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사막 어딘가 누워있을 시신들을 둘러보았다.

 “그 또한 나름, 그들을 위한 기도인 셈이지.”

 레아는 라이너가 왼쪽 입술을 실룩이는 걸 보고 문득 마르카가 누주를 떠나던 날을 떠올렸다.

 

 *

 

 어머니가 하나 남은 쌍둥이 아들이 떠나겠다고 고집 피우는 걸 다섯 번째로 말리던 날.

 그녀는 마르카가 슬쩍 미소 짓는 모습을 한동안, 아니 아주 오랫동안 볼 수 없을 지도 모른다고 예감했다. 정말 가야겠냐고 레아가 다섯 번째로 물었고, 마르카는 다녀오겠다고 여섯 번째로 답했다.

 “수도로 가서 협상하겠습니다. 우리는 노을차를 원하는 만큼, 원하는 가격에, 원할 경우에만 거래하겠다고요. 우리 마을은 세금이나 다름없는 모양새로 찻잎을 팔지 않겠다고요. 다만 이 뜻은 마을을 대표하지 않으나 마을을 아끼는 한 청년의 의견이지요.”

 “그래. 누구도, 물론 나도 마르카가 그런 짐을 짊어져야 한다고 하지 않았다. 너는 형벌을 받고자 스스로 자유를 낭비하는 거야. 감옥에 가둬야 한다면 주인댁이 아니라 우리 집에 가둬야 하는데.”

 “진정 저를 염려하는 사람이, 세상에 어머니만 계시지는 않을 거예요. 이 겨울 따뜻하게 보낸다면 이런 믿음 덕분이겠지요.”

 

 *

 

 푸줏간 주인이자 동시에 두 아들을 이 땅에 뿌리내리게 만든 레아. 그녀가 허리 숙여 손을 내밀었다. 온전한 목소리와 걸음을 잃었으나 잠시 시인이기도 했던 사내. 라이너가 레아의 손을 붙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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