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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카
작가 : JakeCello
작품등록일 : 2021.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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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대장간 앞에서
작성일 : 22-01-03     조회 : 210     추천 : 0     분량 : 2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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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인이 자리 비운 누주의 대장간에 사람들이 들락거렸다. 들어가는 손에는 돈이나 돈에 해당하는 물건이, 나오는 손에는 대장장이의 제품이 들려 있었다.

 레아와 바르바라는 길가 나무 의자에 앉았다. 나이든 여자는 푸석한 얼굴로 대장간을 바라보았고, 소녀는 손가락으로 대장간을 드나드는 사람들을 가리키며 이름을 외웠다. 예전에 날카로운 비명에 가깝던 목소리는 이제 못 들어줄 정도는 아닌 울림에 가까웠다. 여전히 듣기 거북하다고 드러내놓고 찌푸리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들 옆에 케루비니가 조심스레 다가가 물었다.

 “왜 안 들어가시고? 날이 으스레한데.”

 노인은 미동하지 않는 여인에게 답 없는 양해를 구하고 벤치에 앉았다. 두 어른 사이에 낀 소녀가 레아에게 바짝 붙었다.

 “좁게 만들어 미안하구나. 무릎이 시려서 오래 서있지 못해, 이해해주겠니?”

 바르바라가 힘주어 대답했다.

 “으우에”.

 노인은 고맙다고 말하고 주머니에서 말린 대추야자를 꺼내 아이에게 주었다. 소녀가 과실을 손에 쥐고 또래 아이들을 찾아갔다. 케루비니는 달리는 소녀의 뒷모습이 멀어질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품에서 반듯하게 접힌 종이를 꺼내 레아에게 내밀었다.

 “작년에 발미가 보낸 편지일세. 어느 무리에서고 사형수의 시신을 온전히 수도로 옮겨야 한다는 내용일세. 의사의 능력을 높이기 위해 해부용 시체가 필요하다나?”

 레아가 받아 펼쳐보니 종이 끝이 갈색으로 그을린 상태였다. 그녀는 당장은 개의치 않고 내용을 읽어 보았다. 오랜만에 글을 읽느라 눈이 피로했지만, 대부분 쉬운 용어로 쓰여 있어 맥락은 이해할 수 있었다. 모르는 글자가 중간에 나와 장로에게 묻긴 했지만. 케루비니는 레아가 소식을 다 읽을 때까지 잠잠히 기다렸다. 그녀가 원래대로 편지를 말끔하게 접어 케루비니에게 돌려주었다.

 “왜 마저 태우지 않았어요?”

 노인이 편지를 품에 넣고 고개를 저었다.

 “왜 태우려 했는지조차 가물가물하구먼. 확실한 건 이 내용을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았단 거야. 난 그래서 마르카가 교수대에 선뜻 오르겠다고 하여 의아했네. 요 대장장이가 자기 육신이 갈리고 들쑤셔지는 걸 알면서도 사형수가 되겠단 건가? 마르카도 발미에게 무슨 이야기라도 들었을까?”

 한 때 사형수로 지목받은 적 있는 대장장이의 어머니가 그 자리에서 처음으로 케루비니의 눈을 쳐다보았다.

 “마르카는 마르카대로 행동했어요.”

 “그래. 마르카는 마르카다운 일을 한 거야. 의아함은 잠깐 느끼다 말았을 뿐이니, 너무 담아두지 말게나. 자네의 다른 아들은 나에게만 이 소식을 전달했으니. 다른 마을 장로에게 은밀히 물어보았더니 그쪽도 모르는 눈치더군. 이때껏 사형만큼은 무리마다 관례대로 집행했네. 방해하는 주인들은 없었어. 충성과 생산에 지장만 없으면 고유 의식은 지켜주었지.”

 “그 때 내가 목줄을 걷지 않았으면 마르카를 마음 편히 묻지 못했을 지도 모른단 말인가요? 알면서 잘도 관망했네요, 케루비니.”

 “이번 수도 주인은 사형수까지 임의로 취급하려는 행태를 보이네. 꺼림칙하지 않나? 앞으론 사형수를 안 만드는 수밖에.”

 “가능하겠어요? 마르카의 이번 행보에 불만을 품는 사람도 적잖던데.”

 케루비니가 코를 살짝 찡그리며 장난기 섞어 말했다.

 “누가 자네처럼 묻거든 이래 대답하지. 불리하면 이 몸 안에 기어 다니는 노망을 탓하시라.”

 레아는 고개를 저으며 실소했다. 노인이 손가락으로 대장간을 가리켰다. 여자도 그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저들을 보세. 당연하다는 듯 대가를 지불하지. 물론 눈치도 안 보고 거저 빌려가는 이웃도 있어. 마침 왔네. 저 치처럼 말이지. 그러나 대다수 이웃은 대가없이 가져가지 않아. 장대낫이든, 작은 못 하나든.”

 “누주의 대장장이는 이웃이 원하면 대장간을 얼마든지 열어놓을 애니까. 발미와 많이도 투닥거렸죠, 어릴 적엔. 그러다 하나 배운 거예요. 형제의 물건이라도 거저 가져가는 걸 당연히 여기지 말자. 그리고 얼마 전, 여기에 한 가지 책임을 하나 더한 거죠. 남이 내 것을 당연하게 가져가게 놔두지 않기로. 마르카가 직접 그리 표현한 건 아닙니다. 수도에 간다니까, 그런 이유이겠거니 짐작할 따름이죠. 대장간을 활짝 여는 것과 수도에 가서 요청하는 건 다른 걸음이죠.”

 쉬고 노인을 보며,

 “그런데 러비, 걱정 되죠?”

 “로비스? 걱정스럽지. 고 녀석, 늘 떼만 썼는데 이번엔 결연히 떠났네. 누주에서 가장 힘센 장정과 함께이니 무탈하리라 믿네. 다만 너무 이르게 훌쩍 의젓해서 돌아오지나 않을까 걱정이야. 어리광쟁이로 만들고 싶지 않아서 애칭으로 잘 안 불렀는데, 막상 먼 길 다녀오리라 생각하니 참, 다정하게 부를 걸. 이제 와서 유치하다고 러비라 부르지 말라면 어쩌나.”

 “여전할 겁니다. 어리광부리는 면은 여전할 거예요.”

 케루비니는 피곤한지 눈을 끔뻑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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