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테마파크] /가족, 영원한 동반자/ 현구고례 - 딸의 혼례식 다음날, 새 사위에게 인사를 받다
글쓴이 :
한작협 16-04-11 11:22
조회 :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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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6년 3월 28일, 김택룡의 둘째 딸이 혼례식을 올린 다음 날이었다. 아침 식사 후에 새 사위 권근오가 현구고례(現舅姑禮)를 행했다.
첨지의 정실(正室)과 소실(小室), 구고(九臯)의 대평 어미, 박진사(朴進士)의 소실(小室)도 함께 뵈었다. 술 한 잔을 나누고 끝냈다.
다음 날 29일, 비가 세차게 내려 사위 권근오가 돌아가려 하다가 그만두었다. 저녁에 권근오가 침실로 들어가 택룡의 소실
신위(神位)에 절했다. 잠시 뒤 생원 권준신이 택룡의 집으로 하인을 보내 아들 권근오에게 빨리 돌아오라고 재촉했다.
그가 내일 아침 일찍 아들을 보고 나서 대룡산(大龍山)에서 있을 황언주(黃彦柱)의 생신 잔치에 갈 것이라고 했다.
택룡은 사위가 내일 아침 갈 것이라고 하인에게 전하도록 했다.
배경이야기
◆ 조선시대 혼례
이 시기 조선시대 혼례는 서류부가혼(壻留婦家婚)에서 친영(親迎) 제도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주자가례(朱子家禮)』가 도입되면서 주자가 주장한 친영 제도가 점차 정착되기는 했지만, 고려 때부터 행해지던 서류부가혼의 전통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아서 결국 이 둘을 절충한 반친영(半親迎) 제도가 행해지게 된 것이다. 주자가 주장한 친영 제도에서 혼례의 절차는 대개 네 단계의 과정을 거친다. 중매자를 통해 양쪽 집안이 혼사를 의논하는 의혼(議婚), 신랑 집에서 신부 집에 신랑의 사주단자(四柱單子)를 보내고 신부 집에서 신랑 집에 택일단자(擇日單子)를 보내는 절차인 연길(涓吉) 일명 납채(納采), 신랑 집안에서 신부 집에 폐백을 보내는 납폐(納幣), 그리고 마지막으로 신랑이 신부 집에 가서 신부를 맞이하여 본가로 돌아와 신랑의 집에서 혼례를 치르는 친영(親迎)이다. 친영 제도에서는 마지막 단계에서 신부가 자신을 맞이하러 온 신랑을 따라가 신랑 집에서 혼례를 치르는 것이 핵심이다. 그러나 당시 풍속은 서류부가혼의 잔재 때문에 신랑이 친영하지 않고 신부 집에서 혼례의식을 거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혼례식을 올린 신부는 짧게는 하루 길게는 여러 달 정도를 친정에 머물다가 시댁으로 가서 시부모를 뵙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것이 바로 반친영(半親迎)의 습속이었다. 이러한 세간의 풍속은 주자학이 강화되던 조선후기에도 여전히 남아있었는데, 이 때문에 일부 지식인들은 『가례』에 의거할 것을 주장하면서도 당시 풍속을 따르는 것을 크게 부정하지는 못했다. 18세기의 대표 지식인 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 1712~1791)은 자신의 사위 권일신(權日身)을 맞이하면서 ‘적절히 참작한 혼례 의식[婚禮酌宜]’을 저술한 바 있는데, 여기에서 안정복은 우리나라 풍속 중에 혼례가 가장 거칠고 소략하며 인습도 오래되어 변경하기 어려운 것이 있으므로 옛 것과 지금의 것을 서로 참작해서 혼례의식을 만든다고 하였다. [한국고전종합정보 DB, 『순암집(順菴集)』]
이 저술에 따르면 신랑이 신부의 부모를 뵙는 의식의 경우 원래는 신랑이 친영 후에 그 이튿날 신랑이 신부의 부모를 찾아뵙지만, 신랑이 친영하지 않고 세간의 풍속을 따라 신부 집에서 혼례식을 거행했을 때에는 부득이 시속을 따라 혼인한 이튿날에 장인 장모를 뵙되 통상적인 의식에 따라 한다고 하였다. 김택룡의 둘째 딸 혼례식도 반친영 풍속에 따라 거행한 것으로 보인다. 혼례식을 신부 집인 김택룡의 집에서 올렸으며, 사위 권근오는 이튿날 장인 장모를 뵙는 의식을 간단하게 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후 자세한 언급이 없어 김택룡의 딸이 언제 시댁으로 갔는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서너 달 정도를 친정에 더 머물렀던 것으로 파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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