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테마파크] 조부의 조부까지 뼈대 있는 가문이어야 한다 - 엄격한 과거시험 응시자격
글쓴이 :
스토리야 16-10-04 15:57
조회 : 3,200
|
|
../bbs/link.php?bo_table=mento3&wr_id=86.. [557] |
1623년 8월 24일, 여러 읍의 유생들이 각 도회소에 모였다. 조흘(照訖), 즉 과거시험 참가 자격을 검증받기 위해서이다. 유생들은 관아에서 소학(小學)을 공부한 뒤에 향교에 교부하여 과거를 보도록 허락받았다. 생원이나 진사, 초시에 응할 경우 선대로 사조(四祖)가 분명치 않은 경우는 물론이고, 신분과 지위가 다른 서얼은 아예 응시가 불가능했다.
시험관은 안동, 풍기, 예안 세 읍의 수령이었다. 9월 6일이나 10일 후에 시험을 볼 것이라는 공지가 있었다. 9월 2일에는 조카손자 김작(金碏)과 조카 김광철(金光鐵)이 김령을 찾아왔다. 조흘을 마치고, 소학(小學)을 함께 읽고 외우기 위해서였다.
배경이야기
◆ 조선시대 과거 응시생의 집안자격
조선시대 법제상으로는 천인이 아니면 결격사유가 없는 이상 누구나 과거에 응시할 수 있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평민인 양인(良人)의 응시 자격을 보장한다는 규정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응시할 수 없다고 규정한 법조문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현실적으로는 신분에 따르는 아무런 차별이 없었다고 하기는 어렵다. 물론, 무장을 뽑는 무과나 기술관을 뽑는 잡과의 경우 천계의 혈통이 섞이지 않은 사람이면 누구나 응시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문신을 뽑는 문과나 그 예비시험의 성격을 가진 생원·진사시만은 사족(士族), 즉 양반신분이 아니고는 응시하여 합격하기가 어려웠다. 양반신분이라 하더라도 다음과 같은 결격사유가 있는 자는 응시할 수 없었다. ① 중죄인의 자손:사직을 위태롭게 한 모반죄, 종묘·능침·궁궐을 파괴한 대역죄, 국가를 배반하고 외국과 몰래 통한 모역죄, 부모나 남편을 죽인 강상죄(綱常罪), 인신위조죄(印信僞造罪) 등 중죄인의 자손은 영세금고(永世禁錮)하여 과거의 응시 자격을 주지 않았다. 또, 증수뢰(贈受賂)를 하거나, 관물(官物)을 유용하거나, 남의 재물을 불법으로 탐낸 관리를 장리(贓吏)라 하여 처벌하고, 그 아들에게 과거의 응시 자격을 주지 않았다. ② 영불서용(永不敍用)의 죄를 지은 자:범죄를 저질러 영영 관직에 임명될 수 없다는 판정을 받은 자, 즉 현직 관료로서 범죄인에 대한 재판을 일부러 질질 끄는 자와 고문하여 치사하게 한 자, 공물(貢物)을 대납(代納)하는 자, 산사(山寺)에 올라가 말썽을 부리는 유생 등에게는 문과의 응시 자격을 주지 않았다. ③ 재가녀(再嫁女) 및 실행부녀(失行婦女)의 자손. ④ 서얼:태종 때 만들어진 서얼금고법에 의하여 양반의 첩자손은 영원히 금고되어 문과에 응시할 수 없었다. 그러나 1553년(명종 8) 양첩(良妾)의 자손에 한하여 손자 때부터 문과와 무과 응시 자격을 주었고, 1625년(인조 3)부터는 천첩(賤妾) 자손도 증손자 때부터 응시가 가능하였다. 그리고 문과 응시 자격이 없는 것은 아니나, 다음의 경우 응시에 제한을 받았다. ① 원적(原籍)에 없는 자:향시는 시관의 상피인을 제외하고는 타도인의 응시를 금하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 원적을 속이고 타도의 향시에 응시하는 자가 있게 되자, 1744년(영조 20) 원적에 없는 타도인이 향시에 응시하였을 경우 3식년 동안 응시자격을 박탈하였다. ② 도목(都目)에 없는 자:임진왜란 이후 쇠퇴해진 관학의 재건을 위하여 1651년(효종 2) 도목제를 실시하였는데, 이것은 서울과 지방의 유생을 ≪소학≫·≪가례≫·사서 중 1서를 고강하여 조 이상을 뽑아 사학 또는 향교에 분속시켜 면역의 특전을 주는 한편, 청금록(靑衿錄)이나 유안(儒案)에 들어 있지 않은 자에게는 과거응시를 금하는 것이었다. 즉, 과거 때가 되면 서울은 4관원(四館員), 지방은 수령이 학교의 재적생 일람표인 도목을 작성하여 각 시소(試所)에 보냈는데, 시소에서는 도목에 실려 있는 자에 한하여 녹명을 허용하였다. ③ 유벌(儒罰)을 받은 자:조선시대 불미스러운 행동을 한 유생에 대하여 조정에서 과거응시를 제한하는 경우가 있었고, 또 성균관 유생들이 자치기구인 재회(齋會)를 열어 불미스러운 행동을 한 자에게 제적 등의 유벌을 주는 일이 있었다. 이러한 유벌을 받은 자는 그것이 풀리기 전까지 과거응시에 제약을 받았다. ④ 기복(朞服) 이상의 상을 당한 자:부모의 상을 당하거나, 승중손(承重孫)이 조부모의 상을 당한 자는 3년상(만 2년 3개월)이 끝날 때까지 과거에 응시할 수 없었다. 그러나 초시 합격자가 상을 당하였을 경우 거주지 수령의 공문을 받아 예조에 제출하면 다음의 복시에 바로 응시할 수 있었는데, 이를 진시(陳試)라 하였다. ⑤ 현직관료와 종친(宗親):국초 소과는 참하관 이하, 대과는 당하관 이하에게 응시 자격을 주었으나, 1472년(성종 3) 이후부터 소과는 정5품 통덕랑 이하, 대과는 정3품 당하관인 통훈대부(通訓大夫) 이하에게 응시 자격을 주었다. 그리고 종친에게도 국초 과거응시를 허용하였으나, 1471년부터는 금하였다. 이와 같이 법제상으로는 천인이나 특수한 경우가 아닌 이상은 과거시험의 자격을 얻을 수 있었으나, 점점 출신성분을 중시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본문에서 ‘사조(四祖)’를 확인하는 모습으로 미루어 보아 과거 응시자격에 집안을 확인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출전 : 계암일록(溪巖日錄)
저자 : 김령(金坽)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