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테마파크] 17세기 초, 선비의 하루 - 이어지는 모임과 행사, 그리고 잔치
글쓴이 :
스토리야 16-09-28 13:45
조회 : 2,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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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1년 윤2월 1일, 김광부(金光溥) 외 몇몇 사람이 김령을 방문했다. 일족모임에 대한 회문(回文)을 내기 위해서였다. 이야기를 나누다가 일부는 돌아가고, 또 누군가가 찾아오며, 방문객들이 드나드는 가운데, 김령은 하루 종일 지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술을 마시며 시간을 보냈다.
다음날에는 배원선(裴元善)이 그 아우 배윤전(裴潤全)의 관례(冠禮)에 김령을 초청했다. 그들은 김령의 사촌형의 외손자들이었다. 김령은 가자니 몸이 피곤하고, 가지 않자니 그의 바람을 저버릴 수가 없어 갈등이 되었다. 그 다음날엔 지인의 수연(壽宴 : 환갑잔치)에 참석해야해서 일정이 꽤 바쁘기도 한 터였다. 결국 윤2월 2일, 김령은 갈등을 접고 먼 친척의 관례를 보러갔다. 지인 이지가 빈(賓)이 되었다. 모인 자들과 회포를 풀고 밤이 되어 헤어졌다.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데, 나루에 횃불이 이어졌다. 집에 오니 밤이 이미 깊었다.
배경이야기
◆ 조선시대 관례 풍속
관례는 전통사회에서의 남자들의 성인의식으로, 상투를 틀어 갓[冠巾]을 씌우는 의식을 중심으로 한 여러 가지 절차로서, 남자아이가 15세가 넘으면 관례를 행하고, 그 때부터 한 사람의 성인으로 대우하였다. 한편, 여자는 쪽을 찌고 비녀를 꽂아주는 의식으로서 계례(笄禮)를 행하였다. 이와 같은 관례의식은 ≪가례≫의 유입과 더불어 우리 나라에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가례≫의 유입 이전인 고려시대에도 관례의 기록이 나타난다. ≪고려사≫에는 광종·예종·의종 때에 왕태자의 관례를 행한 기록이 보인다. 이로 보아 고려왕실에서도 유교식 관례를 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사대부 집안에서는 예서에 따라 관례를 행하였지만, 대부분의 경우 예서보다 간소하게 행하였다. ① 택일(擇日):≪가례≫나 ≪사례편람≫에 의하면, 남자는 15세에서 20세 사이에 관례를 행하였다. 이는 15세 이상이 되어야 예(禮)를 알 수 있을 정도로 성숙하였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조건은 부모가 기년(朞年) 이상의 상중이 아니어야 된다고 하였다. 즉, 조부모나 백숙부의 상은 기년상(朞年喪)이기 때문에 이런 친족의 상중에는 관례를 행할 수 없었다. 또한, 대공복(大功服)을 입는 상을 당해서 아직 장사를 지내지 않았으면 관례를 할 수 없다고 하였다. 택일에 대하여는 좋은 날짜를 가려서 예를 행하되, 여의치 않으면 정월에서 날을 정하라고 되어 있다. 그때를 놓치면 4월이나 7월 초하루에 하도록 되어 있다. 그 이유는 관을 쓰는 것이 인도(人道)의 출발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② 준비:관례일 사흘 전에 주인은 사당에 고하는데, 이때 축문을 읽는다. 다음은 관례일 전에 빈객을 청하는 절차이다. 관례에서 의식을 주관하는 사람이 빈객이다. 예서에는 종손의 친구 가운데 어질고 예법을 잘 아는 사람을 골라 빈객으로 삼도록 되어 있다. 그리고 관례일 하루 전에는 대청의 동북쪽에 휘장을 쳐서 관례를 올릴 장소를 마련한다. 관례일이 되면 진설(陳設)을 하며, 아침 일찍 관복(冠服)을 꺼내어 준비를 한다. 그 뒤 주인 이하 차례대로 서서 빈객을 기다린다. 빈객이 찬자(贊者)와 함께 도착하면 주인은 그를 맞이하여 방으로 안내한다. ③ 시가례(始加禮):처음 행하는 예를 시가례라고 한다. 시가례는 빈객이 관례자에게 읍을 하면서 시작된다. 관례자는 쌍계(雙笄:쌍상투)를 하고 예복인 사규삼(四揆衫)에 늑백(勒帛)이라는 띠를 두르고, 채리(彩履:무늬 있는 신)를 신고 자리에 나와 꿇어앉는다. 옆에 시중을 하는 찬자가 관례자의 머리를 빗겨 상투를 틀고 망건을 씌우면 주례가 치관(緇冠)을 들고 나와 관례자 앞에서 축사를 읽은 뒤, 치관과 계(笄)를 꽂고 건(巾)을 씌운다. 이어 찬자가 관례자에게 띠를 둘러주면 관례자는 방으로 들어가 사규삼을 벗고 심의(深衣)를 입으며, 큰 띠를 두른 다음 그 위에 수(修:실로 된 흰 띠)를 더하고 검은 신[履]을 신고 방에서 나와 남쪽을 보고 앉는다. ④ 재가례(再加禮):관례자가 정해진 장소에 앉아 있으면 빈객이 관례자 앞에 나아가 축사를 한다. 찬자는 건을 벗기고 빈객이 초립(草笠)을 씌운다. 이어 관례자는 방으로 들어가 심의를 벗고 조삼과 혁대를 두르고 혜(鞋)를 신고 나온다. ⑤ 삼가례(三加禮):관례자가 정해진 자리에 꿇어앉아 있으면, 빈객이 나아가 축사를 하고, 찬자가 초립을 벗기면 빈객이 복두(銃頭)를 씌워 준다. 관례자는 다시 방으로 들어가 조삼을 벗고 난삼을 입으며, 혁대를 두르고 신을 신고 나온다. ⑥ 초례(醮禮):술을 마시는 의례이다. 관례자가 정해진 자리에 남향을 하고 앉아 있으면, 빈객이 관례자 앞에 나아가 축사를 한다. 관례자가 두 번 절하고 술잔을 받으면, 빈객이 답례를 한다. 관례자가 상 앞으로 나아가 잔을 상 위에 놓았다가 이것을 다시 들고 물러나 맛을 본 다음, 찬자에게 주고 빈객에게 두 번 절하면 빈객이 답례한다. ⑦ 자관자례(字冠者禮):관례자에게 자(字)를 지어 주는 의례이다. 빈객과 관례자가 마당으로 내려가서 빈객이 관례자에게 자를 지어주고, 이어 자를 부를 때 축사를 한다. 관례자가 간단한 답사를 하고 절을 하면, 빈객은 절을 받되 답례는 하지 않는다. 이상으로 관례는 모두 끝났으나 예서에 의하면, 주인이 관례자를 데리고 사당에 가서 조상에게 알리면서 고사(告辭)를 읽으면 관례자는 두 번 절한다. 그런 다음 친척들과 빈객에게 두 번 절한 뒤, 밖으로 나와 선생과 아버지의 친구들을 찾아다니며 절을 한다. 농촌에 있는 70세 이상의 노인 중에서 가끔 관례를 하였다는 노인을 볼 수 있다. 이들 촌로들의 관례경험을 보면 반드시 예서에 따른 것은 아니었다. 그 중 ≪예서≫에 가까운 관례는 다음과 같다. 15세가 되어 관례를 올렸으며, 아버지가 친한 친구를 빈객으로 맞이하였다. 빈객은 사랑방에서 관례자의 머리를 빗겨 올리고 상투를 틀어올려 주고 모자를 씌워 준 뒤, 자를 불러 주었다. 관례자는 이어, 손님을 대접하는 잔치를 하고, 이웃 어른들에게 인사를 다녔다.
출전 : 계암일록(溪巖日錄)
저자 : 김령(金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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