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민국, 2016년 12월 31일, 18:59
33. 계략 vs 계략 - ②
오후 6시 59분.
본회의장이 수백 명의 사람들로 떠들썩했다. 의장석에 앉아 미리 작성해 온 연설문의 내용을 점검하던 학현은 시계 바늘이 정확히 7시를 가리키자 기다렸다는 듯이 의사봉을 두드렸다.
땅! 땅! 땅!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학현에게로 쏠렸다. 장내가 정돈된 것을 확인한 학현은 곧바로 회의를 개시했다.
“여러분! 지금까지 여러분의 적극적인 협조 덕분에 거의 모든 의원들을 찾아내 처리할 수가 있었습니다. 저기 전광판에는 생존해 있는 총 의원수가 31명으로 나와 있지만, 현재 예결위회의장에 감금돼 있는 의원이 19명이고 의원회관에 있는 것으로 확인된 의원이 11명이기 때문에, 아직 소재가 파악되지 않은 의원은 단 한명에 불과한 실정입니다.”
사람들은 들뜬 얼굴로 웅성거렸다.
“그럼 1명 빼고 다 찾은 거야?”
“그럼 이제 우리 산 거네?”
몇몇은 아예 벌써부터 서로 악수하고 껴안기도 하는 등 모두들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이를 잠자코 지켜보던 학현은 다시 의사봉을 두드려 장내를 정돈시킨 뒤 말했다.
“여러분, 아직 제 이야기가 다 끝나지 않았습니다.”
좌중은 다시 조용해졌다. 하지만 마음은 이미 들뜰 대로 들떠 버려서 다들 표정 관리가 제대로 안 되는 실정이었다. 학현은 이야기를 계속했다.
“여러분. 유감스런 얘기지만, 그럼에도 지금 우린 심각한 난관에 봉착해있습니다.”
방금 전과는 정반대의 얘기에 장내는 다시 술렁거렸다.
“그게 무슨 소리요? 방금 전엔 1명 빼고 다 찾았다고 했잖소?”
“그래요! 말이 앞뒤가 안 맞잖아요?”
학현은 양손을 들어 사람들을 진정시켰다.
“물론 그렇게 말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회관에 있는 11명입니다. 회관에는 지금 혁신진보당 의원 11명과 보좌진, 그리고 당직자를 포함해 약 100명 가까이 되는 이들이 입구를 봉쇄한 채 숨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1시간쯤 전에 제게 전화를 해 와서 자기 당 의원 11명을 제외한 다른 의원들을 모두 죽여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사람들은 분통을 터트렸다.
“뭐야? 자기들만 다 살겠다는 거야?”
“개새끼들. 그 놈들은 항상 그런 식이야!”
그렇게 모두들 못마땅해 하며 한마디씩 늘어놓고 있는데, 대뜸 웬 젊은 여자 하나가 학현을 향해 소리쳤다.
“그냥 저들이 원하는 대로 해줘버리면 다 끝나는 거 아니에요? 그냥 해주고 말아요!”
그러자 적잖은 사람들이 여자의 말에 동조하며 한 마디씩 보탰다.
“그래요! 그래버립시다!”
“좋은 게 좋은 거지. 이제 이러는 것도 지긋지긋하지 않아요? 그냥 쉽게 갑시다!”
학현은 자못 신경질적으로 의사봉을 두드렸다.
땅! 땅! 땅! 땅! 땅!
본회의장은 다시 잠잠해졌다. 학현의 말이 이어졌다.
“안 그래도 제가 그쪽에다가 ‘우리도 지금 남은 1명을 못 찾고 있으니 그 1명은 너희들 쪽에서 양보해 달라’고 요청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저의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전화를 끊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우린 여전히 그 1명을 찾지 못했고, 회관 쪽에서도 지금까지 어떠한 추가 연락도 없는 상황입니다. 게다가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 이후부턴 구내의 모든 전화가 갑자기 먹통이 돼 버렸습니다.”
사람들의 표정이 금세 어두워졌다. 학현은 계속 말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5시간이 채 안됩니다. 그러니 일단 2시간만 더 수색을 해보고, 그래도 나머지 의원 1명을 찾지 못한다면 남은 방법은 회관으로 쳐들어가는 것뿐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입니다. 이 말씀을 드리고 동의를 얻고자 여러분들을 이 자리에 모이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서둘러 회의를 마무리하려 했다.
“그럼 지금부터는 모두들 한분도 빠짐없이 의원 수색에 나서주시기 바랍니다. 9시가 되면 다시 이곳으로 모일 겁니다. 그리고 모이실 땐 50세 이하의 남자 분들은 각자 무기가 될 만한 것들을 챙겨와 주십시오. 이상 회의를 마치겠습니다.”
회의는 그렇게 끝이 났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선뜻 자리를 뜨지 못하고 있었다. 이를 본 학현은 재차 채근했다.
“뭣들 하십니까? 지금 이럴 시간 없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그제야 마지못해하며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들처럼 터덜터덜 회의장을 나가기 시작했다.
“그래, 이럴 때가 아니지. 이봐, 가자고.”
그렇게 그들은 서로를 격려하며 몇몇씩 무리를 지어 본회의장을 빠져 나갔다. 단상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학현의 입꼬리가 보일 듯 말듯 히죽 올라갔다.
- § -
“뭐야? 여긴 왜 맨날 잠겨 있어?”
회의를 끝내고 대표실로 돌아오던 학현은 웬 무리의 사람들이 대표실 문을 열려고 하는 것을 보고 가슴이 철렁했다.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학현의 등장에, 문을 열려고 하고 있던 남자는 때마침 잘 왔다는 듯이 반가워하며 말했다.
“아, 남 보좌관님. 마침 잘 오셨네요. 여기 왜 잠겨있죠?”
학현은 뜨끔했다. 그러나 애써 태연한 척 하며 둘러댔다.
“당연히 제가 잠가놨으니까 그렇죠. 지금 저한테 앙심 품은 사람이 어디 한 둘입니까? 그래서 혹시나 저 없는 사이에 몰래 숨어들어와 있기라도 할까봐 잠가놓은 겁니다.”
다행히 남자는 납득하는 눈치였다.
“아, 그렇군요.”
하지만 학현에겐 그들은 여전히 눈엣가시였다. 그래서 얼른 다른 곳으로 보내버려야겠다는 생각에 그들을 부추겼다.
“여긴 괜찮으니 어서 다른 곳을 찾으러 가보세요.”
그런데 남자는 집요한 구석이 있었다.
“그래도 만약이란 게 있지 않습니까? 보좌관님의 안전도 점검할 겸 한번 안을 수색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학현은 그의 눈치 없음이 불쑥 짜증이 났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그렇다고 무심코 겉으로 티를 내버렸다간 정말로 의심을 당할 수도 있을 터, 학현은 마지못해 허락하고 말았다.
“그럼 9시 회의 준비도 해야 되니까, 되도록 빨리 끝내 주셔야 합니다.”
“그야 당연하죠. 염려 마세요.”
학현은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문을 열었다. 사람들은 문이 열리기가 무섭게 안으로 우르르 몰려 들어가 여기저기를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학현은 학현대로 아무것도 모르는 척 책상 쪽으로 걸어가면서 곁눈질로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그런데 좀 전의 그 남자가 돌연 화장실에 관심을 보이는 것이 눈에 띄었다.
“여긴 뭐야? 화장실인가?”
그러더니 학현이 한번 말려볼 새도 없이 곧바로 화장실 문의 손잡이를 잡고 돌렸다.
“어? 뭐야, 잠겼잖아?”
학현은 잽싸게 달려가 그의 앞을 가로 막았다.
“잠깐만요!”
남자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네?”
학현은 애써 아닌척하며 능청스럽게 둘러댔다.
“실은 제가 변비기가 있어서…… 간만에 소식이 와 일을 봤는데 그만 변기가 막히는 바람에, 하하하 …… 냄새도 나고 창피하기도 해서 잠가놨습니다. 제발 제 체면을 봐서라도 여기는 그냥 넘어가주시는 게 …… 하하하, 하하하하…….”
얼떨떨해 하던 남자는 그제야 납득하며 덩달아 웃었다.
“하하, 남 보좌관님에게 이런 면이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하하하…….”
학현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은근슬쩍 남자를 부추겼다.
“그럼 이 정도면 확인이 된 것 같으니, 그만 다른 곳을 찾으러 가보시는 게 어떨까요? 저도 제 일을 해야 하니까…….”
“네, 뭐 그리 하는 게 낫겠네요. 여러분, 이만 나갑시다.”
“그럼 수고해주세요.”
“남 보좌관님도 수고하십쇼.”
학현은 그들이 나가자마자 바로 문을 쾅 닫아 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애써 조바심을 억누르며 태연한 척 배웅을 했다. 그리고 그들이 멀찍이 사라진 것을 확인한 뒤에야 슬그머니 문을 닫아걸었다.
문에 등을 기대고 선 학현의 입 꼬리가 히죽 올라갔다.
“흐흐, 흐흐흐흐, 흐하하하! …….”
화장실 안으로 새어 들어오는 그 웃음소리가 왠지 모르게 자꾸 불길하게만 들리는 승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