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민국, 2016년 12월 31일, 21:00
34. 외통수(Checkmate) - ①
예정된 9시가 되자 학현은 기다렸다는 듯이 본회의장에서 회의를 시작했다.
“여러분! 우린 지난 2시간 동안 국회를 이 잡듯이 뒤졌습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마지막 의원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목소리는 확신에 차 있었고 얼굴 또한 한껏 상기돼 있었다.
“이제 시간이 얼마 안 남았습니다. 지금 우리가 택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 그건 바로 저기 의원회관에 틀어박힌 채 우리의 목숨을 볼모로 치킨 게임*을 벌이고 있는 진보당 녀석들을 실력으로 쓸어버리는 것뿐입니다!”
하지만 학현의 바람과는 달리 사람들의 반응은 영 시원치가 않았다. 그런 가운데 난데없이 한 남자가 손을 들고 말했다.
“그전에 한 가지만 물어봅시다. 새벽에 당신이 데리고 나타난 시체가 정말 유승호 의원이 맞는 겁니까? 혹시 어디서 가짜 시체를 가져와서 쇼한 건 아니죠? 그러지 않고서야 어찌 그렇게 찾았는데도 그 한 명만 계속 안 나올 수가 있는 겁니까? 국회가 숨을 곳도 뻔한데. 여러분, 안 그래요?”
학현은 뜨끔했다. 사람들이 그의 말에 드러내놓고 지지를 표하진 않았지만, 분위기 상으로는 내심 동조하는 눈치가 역력했다. 학현의 이마에 어느 새 식은땀이 잔뜩 배어나왔다.
“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전광판에 표시된 거 봤잖습니까?”
그러나 남자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뭐 하루 종일 워낙 이상한 일들만 일어났기도 했고, 그래서 전광판에 의원들 생사가 자동으로 표시되는 것도 크게 이해 못할 일은 아닌데요. 그렇다 하더라도 무턱대고 그게 100% 정확할 거라 맹신하는 것도 좀 그렇지 않아요? 또 다른 의심 가는 점도 몇 개 더 있고…….”
“의심 가는 점이라니요?”
“우선 굳이 그럴 필요까지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유 의원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시킨 것도 수상하고, 또 그 이후에도 유 의원의 여동생하고 그 애인이라는 사람이 머물고 있는 방을 자주 들락거린 게 영 수상쩍다 이겁니다. 보통 그런 경우엔 곧바로 철전지 원수가 되지 않나요?”
“그, 그건…….”
당황한 학현은 우물쭈물 말을 잇지 못했다. 본회의장에 있는 모든 이들의 이목이 순식간에 학현의 입 쪽으로 집중됐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본회의장 출입문 쪽에서 학현 대신 큰 소리로 대답하는 이가 있었다.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일순간 모두의 시선이 한꺼번에 출입문 쪽으로 옮겨갔다. 덩달아 목소리의 주인공을 확인하게 된 학현은 순간 자기의 눈을 의심했다.
“강동원?”
거기에 서 있던 건 동원이었다. 동원은 승희를 곁에서 부축하며 본회의장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중앙 통로를 통해 의장석을 향해 걸어가면서 사람들에게 계속 이야기했다.
“우린 철전지 원수가 맞습니다! 아니 오래 전부터 원수나 마찬가지였습니다!”
통로에 늘어서 있던 사람들은 모두 약속이나 한 것처럼 모세가 바닷길을 열듯 얼떨결에 양옆으로 물러나며 동원에게 길을 터주었다. 이윽고 동원이 단상 위로 올라오자 학현 또한 엉겁결에 의장석을 내줬다. 이에 동원은 당연하다는 듯이 의장석에 자리를 잡고 서서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계속했다.
“죽은 승호 형이랑 학현 선배는 대학 시절부터 서로 앙숙이었습니다. 승호 형이 학현 선배가 동생 승희와 교제하는 걸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죠. 당연히 지금 이렇게 승희와 사귀고 있는 저도 학현 선배와 그리 사이가 좋진 않습니다. 아까 로텐더홀에서 몸싸움할 때 제가 학현 선배한테 얻어맞고 기절했던 거 모두 기억하시죠?”
옆에서 동원의 말을 듣고 있던 학현은 어떻게 보면 치사하게 보일 수도 있는 자신의 치부가 적나라하게 들춰지는 것 같아 얼굴이 화끈거렸다. 동원이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려고 이러는 건지, 혹시 자신의 뒤통수를 치려고 이러는 건 아닌지, 지금이라도 당장 입을 틀어막아야 하는 건 아닌지 머릿속이 계속 복잡했다. 그러나 동원은 그런 학현에겐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채 오직 사람들만 쳐다보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래서 이제 와 하는 얘기지만, 저와 승희는 승호 형을 숨기고 나서도 만에 하나 있을지도 모르는 불상사를 대비해 학현 선배한텐 그 사실을 비밀로 했었습니다. 그런데 저희가 다급했던 나머지 학현 선배가 예상할 수 있을 만한 곳에 승호 형을 숨기는 실수를 범했고, 역시나 학현 선배는 단번에 승호 형을 찾아내 죽여 버렸습니다. 학현 선배는 아마 이때다 싶었을 겁니다. 혼란한 틈을 타 눈엣가시 같던 승호 형을 죽일 수 있게 되었으니까 말이에요.”
학현은 당혹감에 이제 시선처리마저 제대로 되질 않았다. 하지만 동원이 이야기하는 내용의 강도는 한층 더 세졌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아까 학현 선배는 괜히 귀신의 심기를 건드려서 승희가 혀를 잘리고 마는 사태를 초래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어찌 학현 선배를 원수로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학현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본회의장 안에 있는 사람들이 죄다 ‘저런 나쁜 새끼가 있나?’하는 눈초리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동원의 이야기는 계속됐다.
“그 이후에 서로 가깝게 지내는 것 같아 보여서 의심스럽다고요? 네,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을 겁니다. 실제로 그랬으니까요. 아니, 그런 것처럼 행동했으니까요.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 혼자 승희를 돌보기엔 너무 벅차서 도움이 필요했으니까요. 또 어느 사이엔가 학현 선배는 우리가 밖으로 살아나가기 위해선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어버렸으니까요. 그 때문에 전 불가피하게 학현 선배한테 복수하는 걸 잠시 미뤄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동원은 그러면서 문득 고개를 돌려 자신의 옆에 바짝 붙어 팔을 붙들고 있는 승희의 얼굴을 바라봤다. 앞이 보이지 않아 불안한 듯 시선을 한 곳에 두지 못한 채 끊임없이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리고 있는 핏기 없는 창백한 얼굴. 동원은 순간 코끝이 찡해지면서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그러다 잠시 후 울먹거리며 다시 입을 열었을 땐, 눈시울에 찰랑거리며 고여 있던 눈물이 결국 뺨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승희는 아직도 자기 오빠가 이 인간 손에 죽었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 제가 이렇게 큰 소리로 떠들어 대고 있는데도! …… 승희는 그걸 지금 전혀 알 수가 없다 이 말입니다!”
말하는 내내 동원의 두 눈에선 눈물이 펑펑 쏟아져 나왔다. 중간중간 아랫입술을 깨물어가면서까지 눈물을 삼켜보려 애써봤지만, 그럴 때마다 깨물고 있는 입술마저 벅차오르는 감정이 버거운 듯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장내는 일순 숙연해졌다. 잠시 후 끓어오르는 감정을 겨우 진정시킨 동원은 사람들을 향해 마지막으로 호소했다.
“여러분! 전 반드시 승희를 무사히 밖으로 데려갈 것입니다. 그리고 승희를 이렇게 만들고, 승호 형을 죽인 이 인간한테 꼭 복수를 하고야 말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먼저 이 일부터 반드시 성공시켜야 합니다.”
동원의 얼굴은 어느새 잔뜩 상기돼 있었다.
“여러분! 여러분은 단순히 ‘자신’만 살겠다고 지금까지 이 일을 해왔던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 모두를 살리기 위해서 그랬던 것 아닙니까? 그런데 왜 이제 와서 망설이시는 겁니까? 이 아이를 위해, 이 불쌍한 아이를 위해서라도 제발 마지막으로 힘을 보태주세요! 이렇게 머리 숙여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동원은 그러면서 이마가 의장석 책상에 완전히 닿을 정도로 허리를 팍 숙여 고개를 조아렸다. 그러는 사이 동원이 마지막으로 내지른 외침은 본회의장 사방의 내벽에 반사된 후 메아리가 되어 사람들의 마음을 대번에 흔들어 놓았다.
“가, 갈까?”
“이제 와서 발을 빼기는 …… 좀 그렇지?”
그렇게 머뭇머뭇 동원에게 호응하는 이들이 하나 둘 늘어나기 시작하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한 무리를 이루었다. 심지어 혈기왕성한 몇몇은 야단을 떨며 아직 호응하지 않은 사람들을 선동하고 나서기까지 했다.
“여러분, 갑시다! 가자고요!”
“와아!”
그때 동원이 학현에게 슬쩍 눈치를 줬다. 돌아가던 상황을 넋 놓고 멍하니 보고 있던 학현은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동원은 승희를 데리고 의장석에서 내려왔다. 학현은 머뭇머뭇 다시 의장석으로 올라가 큰 소리로, 하지만 동원 쪽을 힐끔거리느라 중간중간 더듬거리며 사람들에게 말했다.
“여, 여러분! 50세 이하의 남자 분들은 이전에 말씀드린 대로 무기로 쓸 것들을 가지고 로텐더 홀로 모여주세요! 그, 그리고 거기서 대기하고 있는 전경들의 지시를 따라 주시기 바랍니다. 30분 후에 회관으로 출발하겠습니다!”
이로써 마침내 모든 일이 당초 학현의 계획대로 순탄하게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학현은 여전히 동원에게서 눈을 돌리지 못하였다. 얼굴엔 초조하고 당혹스러워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동원이 궁지에 몰린 자신을 도와주기 위해 일부러 그렇게 말했던 것인지, 아니면 그 기회를 빌려 진짜 속내를 내비쳤던 것인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 돌연 학현의 안색이 싸늘하게 식었다. 입 꼬리가 히죽 올라가고, 두 눈도 슬그머니 치켜떠졌다. 눈동자 위로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는 동원의 모습이 새삼 선명하게 맺혔다. 학현은 속으로 조용히 콧방귀를 뀌며 읊조렸다.
‘흥, 어차피 지혜 다음은 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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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킨 게임(Chicken Game): 누가 겁쟁이(Chicken)인지 가리는 대결. 갈등 관계에 있는 양쪽 당사자가 상대방이 겁을 집어 먹고 양보할 때까지 강경하게 밀어붙이며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양상을 빗댄 게임 이론의 일종이다. 만약 끝까지 어느 한쪽도 양보하지 않을 경우 양쪽 모두 파국을 맞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