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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저마다 시대를 잘못 만났다(부제: 난세살이)
작가 : 박은혜
작품등록일 : 2018.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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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애초부터 홀로서기를 못하게끔 설계되었다 (1)
작성일 : 18-12-31     조회 : 187     추천 : 0     분량 : 40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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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엄마는 애초부터 홀로서기를 못하게끔 설계되었다 (1)

 

 오랜만에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일요일이 찾아왔다. 당연한 건데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있나 싶었다. 주말도 기꺼이 반납해야 했던 지난 몇 주와 달리, 그날만큼은 10시까지 잘 수 있었다. 마음 같아선 더 자고 싶었지만 교회에 가야 했기에 10시까지만 잤다. 정확히 말하면 10시 8분까지 잤다.

 

 11시. 시간에 딱 맞춰 교회에 도착했다. 맨 앞줄에 우리 외할머니가 보이고 뒷자리에는 부모님이 보였다. 서로 고개를 돌리다가 눈이 마주쳤다. ‘왔냐? 나도 왔다’ 정도의 눈빛만 교환하고 고개를 다시 돌렸다. 평소에도 왕래가 잦다보니, 교회에서 마주친다 해도 특별히 반가울 게 없었다.

 

 성가대 찬송이 유난히 길었다. 자연히 목사님의 설교가 10분 늦게 시작되었다. 늦게 시작된 만큼 빨리 끝나기를 바랐던 것은 희망고문이었다. 당시 미국에서 인종차별과 관련된 총기사건이 터져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었는데, 설교 제목이 ‘사람을 차별하지 말자’여서 그런지, 설교는 조금 더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나는 우리 교회 목사님을 존경한다. 강일현 같은 사람과는 분명 달랐다. 인종차별이 나쁘다는 말은 어찌 보면 뻔할 법한 이야기일지 모르나, 나에게는 유난히 강력한 메시지로 다가왔다. 사람들을 차별하지 말겠다는 다짐을 다시 한 번 해 볼 정도였으니까. 특히 목사님은 인종 차별뿐만 아니라, 이 사회에서 펼쳐지는 여러 가지 차별에 대해 분명한 목소리를 내셨다. 곳곳에서 “아멘” 소리가 터져 나왔다. 특히 데시벨이 높은 외할머니의 아멘 소리는 잠자던 우림이가 깰 정도로 크게 터져 나왔다.

 

 설교는 분명 좋았는데, 많은 것을 깨달았는데……. 그날만큼은 뭔가 아쉬움이 남았다. 뭔진 모르지만 하나가 뭔가 빠진 느낌이 들었다.

 대부분의 교회와 마찬가지로, 우리 교회에는 유난히 노년층이 많다. 말 그대로 옛날 어르신들이다. 교회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자신들이 아들과 딸을 차별하는 것에 아무 문제의식을 못 느끼신다. 좋은 음식을 아들에게 주는 게 마땅하다는 생각을 아직 버리지 못하신 분들이다. 공부에 대해서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아들을 공부시키는 것이 세상의 섭리라 믿으면서, 딸이 공부해야 할 이유는 도무지 모르겠다는 그런 분들이셨다.

 우리 외할머니도 마찬가지다. 외할머니의 아들, 그러니까 올해 마흔 셋이 된 외삼촌은 박사과정까지 거의 이십 사년간 공부했다. 반면, 외할머니의 딸인 우리 엄마는 십 이년 동안 공부했다. 딱 두 배 차이다. 그나마도 외할머니는 인심 쓴 거라고 하셨다. 남들은 고모처럼 국민학교까지만 다니게 하는데, 고등학교까지 나온 여자가 어디 있느냐며 늘 고마워하라고 생색을 내셨다. 물론 엄마가 그 생색에 고마워하실 리가 없다. 엄마는 아직까지도 대학에 못 간 것 때문에 처절한 한이 맺힌 상태다. 사실 중고등학교에 들어간 것도 외할머니의 지원 덕은 아니다. 엄마는 울고불고 가출 소동까지 일으키며 겨우 중고등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다.

 엄마는 신여성이라 그런지, 고모와는 달랐다. 고모가 여성이 학교에 못 들어가는 것을 숙명이라 여겼다면, 엄마는 어떻게든 극복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런 엄마에게도 대학교는 무리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등록금이 워낙 비싸 도저히 갈 수 없었다. 엄마는 중고등학교 들어갈 때처럼 오만가지 땡깡을 피우면 될 줄로 아셨지만 더 이상 통하지 않았다. 통할 리 없었다. 엄마는 고모처럼 스무 살에 바로 시집이나 가라며 떠밀리셨고, 아빠와 결혼하여 지금의 가정을 이루셨다. 그리고 내가 열 살이 되던 해, 엄마보다 열 살 어린 외삼촌은 엄마가 그토록 소원하던 대학에 입학했다.

 

 내가 세 살 즈음에 엄마는 이제라도 대학에 가겠다는 폭탄선언을 하셨다. 물론 양쪽 집안으로부터 된서리만 맞았다. 시댁이나 친정이나 반응은 동일했다. 이제 결혼하고 아들도 낳았으니, 너는 이 세상에서 이루어야 할 꿈은 다 이룬 것이라는 투로 늘 말씀하셨다. 엄마는 울면서 “이럴 거면 차라리 똑똑하지 않게 낳아줄 것이지.” 하며 부모님을 원망했다. 어린 시절, 강철과도 같았던 엄마가 우는 모습을 딱 한 번 봤는데, 그때였던 것 같다.

 이후로도 엄마는 매번 억울함을 슬쩍이나마 표시하셨다. 차라리 공부라도 못 했으면 덜 억울할 텐데, 왜 이렇게 똑똑하게 태어나 아쉬움이 남게 했냐고 원망하셨다. 아무리 못해도 서울에 있는 대학은 갈 수 있었던 엄마에게 이십 대의 시작은 그만큼 서러운 시간들로 채워져 있었다.

 

 외할머니와 엄마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교회의 팔십 대 할머니들 대부분이 그랬다. 오랫동안 한 교회를 다녀서 할머니들의 집안 사정을 좀 아는데, 아들은 그렇게 공부시키면서 딸은 하나같이 대학을 안 보냈다. 중학교도 안 보낸 분들도 많다. 매번 주일 예배가 끝나고 식사를 하실 때마다 그분들은 아들 자랑하기에 바쁘시다. 그런데 딸 자랑하는 분은 한 번도 못 봤다. 공부를 안 시켰으니, 딸 자랑을 할래야 할 수가 없다. 물론 사위 사랑이나 딸이 낳은 손자 자랑을 하는 분은 봤다. 그렇게 아들의 직업, 승진, 손자의 학교 성적을 자랑하느라 일요일의 시간은 빨리 돌아간다.

 어르신들은 딸이 아들 뒷바라지하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명절 때도 열 살이나 많은 고모가 열 살 어린 남동생, 곧 우리 아빠를 극진히 대접했던 모습이 기억난다. 그냥 남동생이라 챙겨주는 차원이 아니었다. 챙김이 아닌 섬김의 이미지가 강했다.

 그 문화에 속한 어르신들은 그게 나쁜지 모른다. 차별이라고 생각을 안 한다. 한국의 고유한 문화라며 옳고 당연한 것으로만 여긴다. 인종차별은 나쁘다고 하면서, 아들딸 차별은 자랑스런 전통문화 계승이라 생각한다.

 어쩌면 서글픈 일이기도 하다. 할머니들도 그런 차별을 받으며 평생을 사셨을 텐데, 너무 익숙해졌기 때문인지 어느 새 자신들도 똑같이 차별하고 있었다. 자신이 서러웠으면 사랑하는 딸이라도 그러지 않게 만들어야 할 텐데 올해 일흔 셋인 고모 같은 분도 있지만, 여전히 대부분의 어르신은 우리교회의 할머니처럼 이대로 가는 게 순리라고 생각하셨다.

 

 내가 국민학교에 막 입학했을 때 방영했던 <아들과 딸>. 이 드라마의 시청률이 엄청났던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그땐 고모나 엄마가 왜 그렇게 열광하며 시청했는지 몰랐는데, 나중에 보니 고개가 끄덕여졌다.

 

 나 역시 아들이라 외할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은 수혜자다. 외할머니는 엄마가 대학 가는 것은 막으셨지만, 손자인 내가 대학에 갈 때는 온갖 쌈짓돈을 다 털어 주셨다. 그런 수혜자이긴 하지만, 내가 보기엔 인종차별만큼이나 나쁜 게 아들딸 차별이었다. 차별 받는 건 내 어머니와 내 딸, 손녀일 테니까.

 아쉽게도 목사님은 이 부분을 언급하지 않았다. 목사님이 “아들딸 차별도 하면 안 된다.”고 한마디 덧붙여주시면 좋을 텐데……. 어쩌면 듣기 좋은 말만 하니 목사님을 좋아하는 건지도 모른다. 그래서 목사님은 그런 예민한 문제를 피해가는 것이고 젊은 성도들을 의식해 인종차별에 덧붙여 사회 내 성차별 문제는 강력하게 비판하셨지만 아들딸 차별은 조금도 언급하지 않으셨다. 분명 하나님은 아들 딸 차별도 몹시 싫어하실 텐데……. 하나님의 귀한 딸이 차별받는 것, 그것도 가족에게 차별 받는 것을 보면 무척이나 슬퍼하실 텐데……. 어르신들이 모두 돌아가시고 나서야, 한풀이 해주듯 아들딸 차별에 대해 말하게 될까?

 

 교회를 나오는 길에 문득 몇 년 전 일이 떠올랐다. 내가 결혼하기 직전이니 4년 전이었던 것 같다. 외삼촌의 아들, 영우가 아홉 살 즈음이었던 어느 날, 엄마와 나는 외삼촌 집에 들렀다. 조카인 영우가 숙제하는 모습이 그날따라 엄마 눈에는 기특해 보였었나 보다. 엄마는 간만에 영우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상투적이지만 진심이 적절히 들어간 말을 건네주었다.

 

 “우리 영우, 열심히 숙제하네. 좋은 대학 들어가겠네.”

 

 그냥 잠자코 숙제만 하면 좋았을 것을, 아무것도 모르는 영우는 엄마에게 대뜸 이렇게 물었다.

 

 “난 고모랑 같은 대학 가야지.”

 

 솔직히 그때 엄마의 얼굴은 보지는 못했다. 영우를 나무랄 수는 없다. 영우 딴에는 고모를 향한 애정을 표현한 것이니까. 고모의 길을 따르겠다고 말하면, 고모가 감동하실 거라 굳게 믿고 있는 듯 했다. 당시 엄마 표정이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날 저녁 내내 웃음을 보이지 않으셨다. 그날따라 즐겨보던 월화 드라마 시청도 포기하신 채 정확히 열시 오 분에 잠자리에 드셨다. 베개에 눈물을 몇 방울 떨구셨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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